치앙마이에서 보내는 편지
안녕하세요, 김선오입니다. 치앙마이에서 보내는 편지라고 제목을 적었지만 저는 지금 치앙마이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도이 사켓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곳에 도착한 지 열흘이 넘었지만 저에게는 도이 사켓보다 치앙마이라는 이름이 조금 더 익숙하고 지금은 더 익숙한 장소의 이름을 제가 머무는 곳이라 대충 눙치고 싶은 그런 기분인 것 같습니다. 새로움을 언제나 필요로 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렇기에 잠시나마 서울을 떠나온 것임에도 언제나 익숙한 쪽으로 기우는 것이 마음인가 싶기도 합니다. 마음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도 않고 쓰고 싶지도 않지만 익숙하기에 마음이라 말해버리는 이유도 마찬가지겠지요.
저는 지금 제가 머무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근처의 리조트에서 운영 중인 야외 수영장의 선베드 위에 누워 있습니다. 정체 모를 작은 새들이 번갈아 수영장 주변에 앉아 물을 마시고 갑니다. 수영장은 해수로 채워져 있어 몹시 짠데요, 그것도 모르는 새들이 물을 마시고 있네요. 새들도 짠 맛을 느낄 수 있을까요. 수영장 물이 짜다는 사실을 아는 이유는 저 역시 수영을 하다가 여러 번 물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수영을 하러 이곳에 온 것은 아닙니다. 작업을 하러 왔지요. 김리윤 시인과 저는 아무도 모르게 ‘텍스트바이텍스처’라는 이름의 그룹을 결성했습니다. 마치 대단한 일을 할 예정인 것처럼 자기소개서와 작업계획서를 허황되게 작성한 뒤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지원하였고 운 좋게 선정되어 오게 되었어요. 저희가 지원한 프로그램은 바로바로... ‘젠더 유동성(Gender Fluidity)’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논바이너리로 정체화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주말을 맞아 치앙마이 도심에 위치한 레즈비언 바에 다녀왔는데 우연히 합석하게 된 미국 친구 한 명이 자리에 앉자마자 저희 일행들에게 한 명 한 명 너의 정체성은 뭐냐고 물어보더군요. 젠더 경찰인 줄 알았습니다. 젠더 경찰이든 젠더 범인이든 퀴어들은 참 귀엽고 여러모로 미쳐 있는데 (그날 밤에만 미친 사람을 몇 명 보았는지 모릅니다) 그 미쳐 있음이 또 사랑스럽고 그렇습니다.
저희와 함께 이 레지던시에 머물고 있는 아티스트들은 모두 퀴어입니다. 호주에서 온 레이첼, 영국에서 온 조나단, 캐나다에서 온 토비아스, 미국에서 온 낸시. 자연스럽게 자신의 대명사를 소개하고 서로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영미권 각국의 억양을 강제로 듣다보니 이곳이 영어 캠프인지 아티스트 레지던시인지 헷갈립니다만 이들 역시 모두 귀엽습니다. 다들 얼마나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작업을 하는지 몰라요. 아침 식사는 오전 8시인데 그 전부터 공용 작업실에서 낸시와 조나단은 한창 작업 중입니다. 모두 젠더 유동성을 주제로 한 새로운 작품을 준비 중이고 다음 달 중에 치앙마이의 작은 디자인 센터에서 공동 전시를 하게 될 예정입니다. 혹시 이 기간에 치앙마이에 머무는 분들이 계신다면 놀러 오셔도 좋겠어요.
김리윤 시인과 저 역시 젠더 유동성과 관련한 새로운 작업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태국의 귀신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시각 작업으로 영상과 설치 매체로 전시될 예정입니다. 한국에 돌아가서는 이와 관련한 책을 한 권 펴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스테이트먼트는 조만간 아지테이트를 통해 소개할 수 있을 거예요. 시는 안 쓰냐고요? 네, 안 쓰고 있습니다. 아지테이트 구독자 분들께만 미리 말씀을 드리자면 저희는 저희의 작업을 시라는 장르, 혹은 언어라는 매체에서 출발해 더욱 다양한 시청각적 작품으로 넓혀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동시에 이 불온하고 불순한 마음이 우리의 시를 어떤 방식으로 바꾸어 나가게 될지 궁금해 하면서요. 아지테이트는 저희가 저희의 매체를 넓혀 감에 있어 반드시 필요했던 공간입니다. 둘만의 외로운 여정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함께해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여기까지 쓰는 동안 개미에게 다섯 방 정도를 물린 것 같습니다. 제가 이 글을 조금 급하게 마무리 짓는 것 같아 보인다면 개미들 때문이겠거니 하고 생각해주세요. 요즘은 ‘이유’라는 개념에 대해 자주 생각 중인데요. 이유는 말해지지 않을 때 이유라는 것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입니다. 어떤 일은 그냥 일어나고 이유란 덧붙여지는 장식 같은 것이지요. 이유는 이야기되기 위해 존재하고 이 세계는 이야기이니까 세계의 이어짐을 위해 이유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유를 말해버리는 순간 이유가 될 수 있었던 다른 모든 것들은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요. 제가 이 글을 급히 마치는 이유가 개미 때문이라고 말하는 순간 저의 피부 위로 내리쬐는 너무 뜨거운 태양이나 배고픔이나 장시간의 수영으로 인해 당기는 얼굴과 같은 다른 이유들이 보이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처럼요. 하나의 이유가 말해질 때 다른 이유들이 살고 있는 공간은 정전되어 버립니다. 이유가 될 뻔했던 다른 이유들의 얼굴은 어둡게 지워지는 것이지요. 이유가 될 뻔한 것들의 얼굴을 지우는 단 하나의 이유를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유는 뭘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저는 지금 이곳에 와 있습니다.
너는 왜 거기에 있니? 누군가 묻는다면 제가 뭐라고 이유를 댈 수 있을까요. 왜 시를 쓰고 있지 않니? 이런 질문은 또 어떨까요. 그럴 듯한 이유를 말해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듭니다. 다른 이유들의 얼굴이 저를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져서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을 예정이니? 이런 질문도 떠올려봅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습니다. 저에게는 약속된 시집들이 있고요. 다만 앞으로는 나의 시들이 시가 아닌 형태로 존재해도 좋겠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는 중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모든 이유들의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아무 이유도 말하지 않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겠지만요. 그나저나 저의 피는 곤충들이 매우 좋아하는 먹이인 것 같습니다. 개미들에 이어 모기들이 달려드네요. 제가 오십 방 정도 물릴 때 김리윤 시인은 옆에서 두 방 정도 물립니다. 조금 억울하군요. 슬슬 샤워를 하고 숙소로 돌아가 보아야겠습니다. 이곳은 한국과 두 시간 시차가 있습니다. 모두 이유가 필요 없이 좋은 저녁 보내시기를, 저도 그러겠습니다.
김선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