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들―새 얼굴로」를 위한 시작 노트
언젠가 나는 얼굴 너머의 신체를 모두 소거한 조각들, 그러니까 얼굴들로 가득한 전시실에 있었다. 그것들은 몸 없는 얼굴, 몸의 부재를 망각하게 하는 얼굴이었다. 몸으로부터 떨어져나오거나 분리되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얼굴, 얼굴이란 처음부터 단지 얼굴로서만 존재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얼굴, 얼굴 자체로 완결된 양식의 얼굴. 차갑게 살아 있는 흙덩이인 그 얼굴들은 나와 마주 보는 동시에 나의 시선을 폐기하고 있었다. 시선은 얼굴의 표면에서 미끄러지고, 그것이 얼굴을 씻기고 있는 것처럼 볼수록 그 표면이 가진 세부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무런 기호도 아니고 어떤 의미도 없는 형상으로서의 세부들. 얼굴이라는 물질을 그렇게 씻기듯 바라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뼈와 살로 이루어진 따뜻한 인간의 얼굴은 눈을 감고 있어도, 나를 보지 않아도, 눈앞에 놓인 것만으로 눈길이 닿으면 눈과 눈이 뒤엉킨 시선 뭉치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언젠가 나는 극장에서, 70미터가 넘는 깊이의 동굴을 탐험하는 과정을 기록한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극장은 동굴과 같은 양식을 공유하는 장소다. 극장 바깥의 세계에서는 체험하기 어려운 캄캄함이 도사리고 있고, 수평이 아닌 다른 방향의 움직임을 꿈꾸게 되며, 시간은 그 공간 안에서만 작동하는 운동 방식을 갖는, 보이지 않는 출구에 대한 믿음 혹은 앎이 호위하는 공간. 암흑으로 구성된 세계. 어둠의 공간화. 그리고 동굴에서 헤드랜턴을 쓴 머리들은 얼굴을 은폐하며 광원이 된다. 헤드랜턴이 비추는 범위 바깥은 모두 암흑이라는 추상이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걷던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볼 때, 둘의 마주 봄이 공간을 켤 때, 어둠은 깨지고 추상은 흩어지며 구체를 드러낸다. 옆을 돌아보자 스크린 내부에서 켜진 빛이 공간을 유출하며 잠든 얼굴의 윤곽을 비추고 있었다.
서성이는 발과 응시하는 눈이 모두 떠나고 불 꺼진 전시장의 얼굴들을, 얼굴의 둘레와 그 바깥을 생각한다. 얼굴을 광원 삼는다면, 마주 봄이 공간을 켠다면, 우리는 그 공간에 놓인 것들을 더듬으며 우리의 눈을 잠시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전시장을 나오자 밖은 너무 환했다. 극장을 나왔을 때도. 보이는 것이 참 많았다.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걸 잊어버리면 발바닥이 접하는 지면이 물컹거리기 시작한다. 발견되지 않기 위해 잊지 않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쌓아둘 환하고 단단한 지반을 잃어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