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들
흰옷은 입는 순간 흰 것이 아니게 되고야 만다
소맷부리를 세탁비누로 문지르며 물 앞에 서 있었지
비누는 모서리가 둥글고 희지 않은 것
황망히
손끝이 허옇게 불어 터지도록
새로 만든 흰 거품들이 더러워지는 것을 보다가
우리 어디에 묻힐까
잠 대신 어디에
몸에 익은 더러운 이불을 꼭 쥐고
깨끗하게 파묻힌 잠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과
묻힐 곳을 찾으러 왔어
눈덩이를 부풀리듯이 경단을 빚듯이
작고 연약한 잠을 굴리면서
여기가 장소일까?
대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여긴 참 잠들기에 좋으니까
아무튼 우리의 집이라고
집은 습관이나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했어
정말로, 정말로 멀리 와 있어
어디서 멀어진 것인지 알 수도 없을 만큼 멀리
어디를 둘러봐도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들려줄 이야기가
밤낮없이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얼굴이 있는 곳
난폭한 졸음 사이로
혼곤한 잠 안팎으로
결말 없이 스르르 점멸하는 이야기가 굴러다니는 곳
여기서 나는 이야기의 천재가 된 것 같고
잊은 것만 빼곤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었지
겪고 본 것, 상상한 것, 있었던 일과 없었던 일
오거나 오지 않은 시간을, 지나간 시간을
번복되는 지금을
기억은 충분히 허약하지 않고
시간을 부리고 다니면서
언제나 갓 캐낸 것처럼 신선한 얼굴을 들이밀지
아무것도 꿈은 아니다
형광등이 켜진 환한 방을 서성이느라
백주 대낮을 다 흘려보냈지
자연스럽게 주어지지는 않는 빛
형광등이 켜진 방에서
한낮을 상상하기
한밤중을 상상하기
상상한 것을 믿기
산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높이를 생각하는 상상력
그런 것을 용기라고 부른다면
빛남 없이
빛에 속한 채
잠든 사람에겐 도무지 거리 감각이란 게 없고
무람없이 서로의 잠 속을 헤집으며
반복되는 잠 반복해서 살기
죽도록 사랑하고 싶음
처음부터 다시
어떤 흰 것도 기억 속의 흰색만큼 충분히 희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