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독자님께 1어쩌다책방 《이달의 작가전》(2024.1.11―2.29)을 위해 작성했던 작가의 편지
안녕하세요, 김리윤입니다. 익명의 독자님께서는 어떤 표정과 마음과 몸으로 이 겨울을 통과하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지금 우리의 얼굴 위로 어른거리는 시간의 촉감, 온도, 빛깔, 속도 같은 것을 상상해 봅니다. 이 상상 속의 시간, 그것의 부드럽거나 딱딱하거나 물컹하거나 날카로운 촉감을, 뜨겁거나 미지근하거나 차가운 온도를, 또 무수히 다른 성질들을 보고 만지고 있노라면 우리가 속한 동일한 현재라는 것 역시 일종의 환상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시간이라는 것을 겪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도요.
저는 바다 곁의 호숫가에 앉아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지난밤에는 서울에 갑작스러운 폭설이 내렸고, 시야를 어지럽히며 내리는 눈 속을 통과해 작고 어둑한 가게에 도착했지요. 방금 우리의 어깨를 털어낼 때 만진 눈처럼 사각거리는 살얼음이 낀 정종을 마시다가 눈 쌓인 바다를 보기 위해 즉흥적으로 기차를 탔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조금도 눈이 내리지 않았군요. 기차역에서 숙소까지 이동하는 동안 택시 기사님께 이 지역은 산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겨울에 눈이 잘 내리지 않는다는, 오히려 눈의 가능성이 서서히 소멸하는 초봄 무렵에 폭설이 내리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앉아 바삭바삭 말라 회갈빛으로 수렴된, 한 가지 색채 안에서 명도로만 이루어진 것 같은 겨울 풍경을 보고 있자니 지난밤의 폭설 역시 너무 선명한 허구처럼 느겨집니다. 이렇게 앞뒤로 어른거리는 시간이, 언제나 흩어지고 투명해지는 시간이 우리 안에서 맺히고 고여 있는 방식을 저는 늘 신비롭고 두렵고 아름다운 것으로 느낍니다.
재작년 이맘때쯤 저는 『투명도 혼합 공간』에 들어갈 시를 배치하고 다듬으며 겨울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어둑한 실내에서 흰 A4 용지가 얇고, 모서리가 날카로우며 잘 구겨지는 희미한 광원처럼 빛나던 장면이 그 겨울을 색인하는 이미지로 저장되어 있어요. 그 시간이 종이와 활자와 제본용 접착제로 이루어진 한 권의 책이라는 물질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으로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조금 낯설고 신기합니다. 그리고 그 물질 위로 계속해서 새롭게 어른거리는 시간이 도착한다는 사실도요. 책이라는 물성을 갖게 된 지 이제 일 년 반가량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사이 『투명도 혼합 공간』 위로 어른거렸거나 맺혀 있던 시간들과 책장을 넘기는 당신의 손가락 위로 어른거릴 시간들을 상상해 봅니다.
“투명도 혼합 공간”은 일종의 명사이자 낯선 배치의 낱말인데, 이 낯섦 속에서 일종의 얼굴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투명’이라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보이는 표면이자 한눈에 포착되지 않는 몸 전체를 이해할 실마리를 제공하는 표정 같은 것. 내부를 감싸며 반투명하게 드러내는 표피라고 느껴지는 것. 그래서인지 독자가 되어준 이들이 이 시집을 설명하는 데 가장 많이 쓰인 형용사 역시 ‘투명하다’였습니다. “투명도 혼합 공간”은 색상·명도·채도를 3차원으로 표현한 색 공간을 뜻하는 용어지만, 물리적인 공간은 아니기 때문인지 의미와 붙여두어도 쉽게 기호로 전환되지 않는 흐릿한 낱말로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감각하기에 “투명도 혼합 공간”은 대상의 투명성을 설정된 공간의 성질에 따른 불투명성으로 바꾸는, 그러니까 투명한 개체를 불투명한 것으로 변환하는 조건에 가깝습니다. ‘투명하다’는 형용사를 무화시키는 것에 가까운 “투명도 혼합 공간”이라는 합성어가 ‘투명하다’와 비슷한 단어로 보이는 것이, 이 오역과 오해가 저는 무척 재밌고 좋습니다. 투명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투명해야 한다는 조건이 어떤 필요에 의해 동원되며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는지, 투명성을 지닌 개체를 두렵게 만들지 않고, 투명성을 필요로 했던 조건을 훼손하지 않으며 불투명하게 만들어 보이는 것으로 눈앞에 둘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지난해 연말에는 심해 생물을 다루는 책에서 유리문어에 대한 문헌을 읽었어요. 유리문어는 이빨이나 독, 껍질이 없어서 물속에 숨어 있는 포식동물의 완벽한 먹이가 되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지요. 유리문어는 살아남기 위해 거의 완벽한 투명 상태를 택했다고 합니다. 암전된 심해의 투명한 유리문어를, 주어진 연약함을 보호하는 조건으로서의 투명성을 택한 생물을 상상합니다. 여기까지 쓰고, 불투명한 상태로 눈앞에 놓인 얼굴을 봅니다. 아주 선명하군요.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고 저의 손바닥 너머로 다른 몸의 뼈와 살, 피부 아래의 체온이 느껴지겠군요.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을 무렵의 저는 시를 쓰는 일이 가능하게 하는 믿음이 있고, 믿음이 중요하며, 그것이 계속해서 삶과 시 쓰기를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저는 내 믿음과 관계없이 그냥 있는 세계가 있고,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그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살아 있음은 무언가를 보는 일과 견고하게 엉켜 있으며 우리는 보기를 통해 세계와 뒤엉킬 수 있다고요. 보기는 움직임과 동선을, 움직임이 불러오는 경험과 마음을 발생시킵니다. 무엇을 믿기 위해 나를 작동시키는 것보다 무엇을 보기 위해 나를 작동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응시는 언제나 ‘보다’라는 동사를 동반하고, 동사는 행위를 데려오니까요. 몸을 옮기게 하거나 풍경을 수선하게 하는 보기, 몸을 옮기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구하거나, 풍경에 무언가를 심거나, 만들거나, 부수거나, 오려내게 만드는 보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를 쓰는 일이 가능하게 하는 보기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몸을 가진 이미지를 생산하지 않고, 물리적인 시각을 요구하지 않는 시 안에서 발생하는 눈이 있습니다. 눈을 감은 채 내 바깥의 모든 것을 세밀한 해상도와 미세한 돌기를 가진 것으로 감각하게 하는 꿈처럼, 있는 그대로의 눈을 폐지하는 보기가 시에는 있습니다. 언젠가 메모해 두었던 책의 서문에는 “문장은 두 가지 힘이 있다. 그것은 영원하고, 한순간에 말해진다. 그것은 익명적이지만, 살과 피를 가진 자에 의해 말해진다.”라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시는 영원을 가능하게 하는 보여주기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순간에 미완의 세계를 불러내, 몸의 없음을 통해 피와 살과 뼈를 가진 몸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보여주기라고요.
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어둠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개가 깨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잘 깨지는 개 앞에서 어둠은 부드럽게 우글거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장 최근에 쓴 시의 일부입니다. 볼 수 없는 것과 보이는 것이 없는 상태를 우리는 정말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알 수 없지만, 깨지는 것을 두려워할 개가 있다면 어둠이 깨지는 것이 두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덜 두렵거나, 견딜 수 있을 만큼만 두렵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개’의 자리에 다른 무엇을 넣어도 좋고, 어떤 성질과 형상을 지닌 것이든 간에 일단 개라고 부르고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다시, 우리의 얼굴 위로 어른거리는 시간을 생각합니다. 연약한 시간이 투명해지고 있을지, 시간 아래 놓인 우리의 연약한 얼굴이 투명해지고 있을지 알 수 없군요. 아무쪼록 어둠 대신 깨지는 것을 두려워할 개를 푹신한 것으로 감싸 주머니에 넣거나 꼭 안은 채로 이 겨울을 통과하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그 위로 어른거리는 시간에 행운과 용기가 서려 있기를.
김리윤 드림
- 어쩌다책방 《이달의 작가전》(2024.1.11―2.29)을 위해 작성했던 작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