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과 단어의 거처
이상 시인의 연작 제목 ’오감도(烏瞰圖)’는 ‘조감도(鳥瞰圖, bird's-eye view)’라는 단어의 새 조(鳥) 자를 까마귀 오(烏) 자로 변경한 조어다. 이상은 ‘새의 눈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뜻의 ’조감도‘라는 단어 안으로 깊이 들어가, 마침내 단어가 생성되는 순간에 도착했던 모양이다.
그는 ’새’라는 흐릿하고 넓은 범주를 ‘까마귀’라는 실체적 대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낱말의 추상적 성격을 소름끼칠 만큼 구체적인 이미지로 회복한다. ‘까마귀의 눈‘이라는 생동하는 주체는 ‘오감도’를 읽는 이의 인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 개입은 이상의 시에 대한 독서의 방식과 시선을 총체적으로 변경한다. 그러므로 ‘오감도‘라는 단어는 수용자의 인식 전체를 흔들며 읽히고 발화되는 것이다.
이 기적 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건축가였던 그에게 일상적이고 식상한 단어였을 ’조감도’를 어떻게 ‘오감도‘라는 말로 바꾸어 ‘새‘라는 추상의 감옥으로부터 까마귀를 구출해낼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이상은 단지 ‘조감도’라는 말을 잘 들여다보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오감도‘ 이전에 ’조감도’라는 제목을 먼저 붙여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조감도’라는 단어가 시에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는 ‘조감도’라는 단어가 말하려는 바를 다시 보고, 다시 들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다 그 말의 기원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그곳에서 까마귀의 이름과 얼굴을 발견했을 것이다.
하나의 단어 안에서 얼마나 깊어질 수 있을까. 내가 쓰고 말하는 단어는 한국어의 지난한 역사를 거쳐 어떻게 지금 나의 혀와 손끝에 살아 있게 되었나.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2010년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은사였던 빌헬름 켐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빌헬름 켐프 선생이 한음 한음 신중하게, 거의 종교적인 태도로 음을 다뤘던 것이 기억나요. 물론 그런 방식이 모든 음악에 맞지는 않겠지만, 제가 같은 곡을 반복해 연습하는 것은 그 음이 담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내려는 작업인 셈이죠.”
단어가 이미 언어 안에 있듯이 하나의 음 또한 음악 속에 놓여 있다. 음악의 요소로서 음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음을 잘 듣기 위해 음악 전체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단어가 시의 재료인 것이 아니라 시가 단어의 거처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