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되는 세계
어디에든 앉아서 그곳을 본다. 그곳에는 시간이 있고 풍경이 있다. 그곳은 하얀 잎맥이 실핏줄처럼 뻗어 있는 잎사귀 위거나 잘려나간 색면 같은 하늘이거나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 전체다. 인간의 몸이 걸어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넓이를 우리는 공간이라 부르지만, 넓이와 무관하게 눈이 닿는 곳은 장소가 될 수 있다. 몸보다 눈이 먼저 그곳에 갈 수 있다.
시간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을 만큼의 강도로 풍경을 변화시킨다.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움직임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눈이 알아채기 전에도 모든 것은 움직이고 있다. 잎사귀가 말라 바스러지고 하늘에 노을이 찾아오고 도시 전체가 허물어져 폐허가 되기 전에도. 움직임은 어디에나 있어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고 우리의 눈은 그 사실을 허술하게 포착한다.
함부르크 다이히토어할렌(Deichtorhallem Hamburg) 전시장 전체를 뒤덮은 카타리나 그로세(Katharina Grosse)의 그림은 과거의 움직임을 그림의 형식으로 미술관에 끌고 들어와 공간의 시간을 굴절시키는 듯했다. 전시장 한켠의 블랙박스에서는 그의 작업 과정을 녹화한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방독면을 쓰고 수십 미터 길이의 흰 천 위에 호스로 물감을 뿌리는 그로세의 반복적인 움직임이 일종의 퍼포먼스로 작동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그림이 그의 움직임에 대한 기록물이라면, 같은 그림을 스코어 삼아 다른 사람이 그와 동일한 움직임을 재현할 수 있을까? 하나의 악보를 여러 명의 연주자가 연주하듯이, 그리는 동작을 타인의 몸으로 재상연할 수 있다면? 동작이 미묘하게 달라지고 어설프게 열화되더라도 불가능한 일 같지는 않다.
세계 전체의 움직임을 기록한 스코어가 있다면, 그 스코어를 완벽히 따라하는 또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또다른 세계에서 비는 빗소리를 연주하기 위해 내린다. 운명을 실현하기 위해 사람은 태어난다. 죽음을 상연하기 위해 생명은 죽는다. 걸음을 만들어내기 위해 모두가 걷고 사랑을 재현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악보에 의한 모든 연주가 그러하듯이 실수와 우연과 변칙이 발생한다. 그것이 또다른 세계를 고유하게 만든다. 어쩌면 그 세계가 바로 이 세계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스펜서 마이어(Spencer Mayer)의 [William Bolcom: Piano Rags] 음반에서 들려오는 기가 막힌 싱코페이션을 들으며 한 망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