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조금의 숲
바위산이 있다. 꼭대기가 있다. 작은 동굴이 있다. 그 속에 너는 앉는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동굴의 열린 쪽을 향하고 있다. 너는 너의 몸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빛과 어둠을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속눈썹의 미세한 떨림을 느낀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발밑에 펼쳐진 숲과 머리 위에 펼쳐진 하늘과 네가 앉아 있는 동굴을 동시에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동굴 안의 추위와 동굴 밖의 더위를 동시에 느낀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바위산의 낮과 밤을 동시에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새빨간 태양과 쏟아지는 비를 동시에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네가 아직 너로 결정되기 이전의 만남들을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너의 이름을 만들기 위해 모여드는 자음과 모음의 움직임을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너를 부르던 무수한 음성을 동시에 듣는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그 음성들이 하늘로 땅으로 흩어져 빗소리 바람소리가 되는 장면을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비의 의지 그리고 바람의 의지를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의 시선이 너의 의지와 무관하게 숲의 한 곳으로 추락한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보호받고 있다고 느낀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할머니가 주무시고 계신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다섯 살 정도의 네가 그 곁에서 잠을 청할 때 네모난 햇빛이 이불 위에서 떨고 있음을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의 시선이 하늘로 솟구친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시선은 다시 숲의 한 곳으로 추락한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기차 창문 위에 둥둥 떠 있는, 교복 입은 너의 반영을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반투명한 풍경들이 너의 반영을 통과한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백사장을 산책하는 너의 뒷모습을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네가 읽은 모든 책들이 펼쳐진 공터를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모든 책의 모든 페이지가 공터임을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비명 사이에 섞인 파도 소리를 듣는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어떤 죽음을 보았다는 생각이 너의 머릿속을 스쳐가지만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의 시선이 하늘로 솟구친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숲의 일부가 불타 있는 모습, 불탄 자리가 다시 수풀로 무성해지는 과정을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추락하는 시선.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호숫가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백발의 너를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바람이 한 장씩, 두 장씩 책장을 넘긴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호수 표면 위로 떨어진 몇 개의 눈송이가 녹아버리며 금세 호수의 일부가 되는 장면을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너의 가족들이 살아났다가 죽어가는 과정을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너의 친구들이 살아났다가 죽어가는 과정을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너의 눈 밖으로 눈물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너의 과거와 너의 미래가 모두 이 숲에 속해 있음을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너의 과거와 너의 미래가 아닌 것들도 모두 이 숲에 속해 있음을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영원히 떠지지 않는 너의 눈꺼풀을 본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눈을 뜬다. 집은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