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올 때

기억은 몸의 내부에 기록된 외부이며 특정한 시공간이 하나의 신체에 파고든 흔적이다. 파도가 바다로 되돌아간 뒤 백사장에 남은 물자국처럼, 물자국이 파도의 형상과 움직임을 평면 위에 기록하듯이 열화된 시공간은 감정과 함께 기억으로 축적된다.

기억의 발생이 지속되는 한 존재의 시간은 단선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하기 때문에 시간은 나선형으로 흐른다. 그래서 우리는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자꾸만 과거의 어딘가로 되돌아간다고 느끼는 것이다.

소리가 기억을 몽롱하게 지시한다. 하나의 소리로 수렴 가능한 사건과 장면들이 교차되거나 혼합된다. 장작 타는 소리와 비 내리는 소리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소리를 경유하여 기억은 상상 쪽으로 뒤척이거나 상상이 기억을 불러낸다. 상상과 기억의 반복 운동을 하나의 청취 방식이라 부를 수 있을까.

모든 소리들을 가로지르며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는 빈터가 아니다. 언제나 의미와 감정으로 촘촘하게 채색되어 있다. 그러나 한 겹씩 쌓이는 목소리들의 지층은 흐르는 덩어리로서 의미와 감정의 층위를 서서히 소거한다. 목소리를 빈터로 되돌리면서, 발음 간의 구획을 부드럽게 무너뜨리면서 그곳에 다른 감각의 자리를 마련한다. 몸을 낮추고 소리더미의 일원으로 조심스럽게 발음되는 음성들은 원본 없는 잔상과 닮았다. 소리가 소리의 기억으로서 발화된다.

물소리가 들려온다. 호수의 안쪽으로 맨손을 집어넣는 소리인지, 돌 하나를 던져 파도를 뚫는 소리인지, 빗물 통 안으로 지붕에 고여 있던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인지 알 수 없고,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동안 나는 가능한 모든 순간을 체험한다.

나무와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가 뒤이어 들려오고, 나는 나와 친밀한 나무들의 흔들림을 떠올리고, 죽은 나무와 산 나무를 모두 같은 소리의 공간 안으로 불러온다. 기억 속의 모든 나무들을 일으킨다. 모든 돌을 던지며 모든 금속을 만지며 모든 숨을 쉰다.

하나의 소리는 모든 세계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올 때, 그것은 침묵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