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손》 1김리윤 개인전 《새 손》, 2023.8.25 ― 2023.9.16, 전시공간 리:플랫 을 위한 작업 노트
관찰하는 것은 시선을 통해 사물에 개입하는 행위다. 세계를 목격하거나 관찰하는 동안, 그리고 시를 쓰는 동안 종종 어도비(adobe) 소프트웨어에서 레이어 간의 ‘혼합 모드(blending mode)’를 떠올린다. 무수하게 포개진 레이어로 구성된 세계. 그리고 표준, 디졸브, 어둡게 하기, 곱하기, 색상 번, 선형 번, 밝게 하기, 스크린, 오버레이, 핀라이트, 차이, 제외, 색조, 채도, 색상, 광도를 기준으로 이 모든 레이어들을 뒤섞기. 정렬하기. 다시 바라보기. 어떤 혼합 방식은 모든 레이어의 형태와 색을 곱하듯이 포개어 보여주고, 수많은 레이어를 이런 식으로 포개어 본다면 어떤 것도 온전히 볼 수 없다. 각각의 레이어에 존재하는 형상이 서로를 흡수하듯이 깊어지면 그것은 어둠에 가까운 이미지가 된다. 표준 혼합 방식은 모든 레이어를 불투명한 것으로 설정하고 가장 앞의 레이어만을 깨끗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뒤의 레이어들을 모조리 깨끗하게 지운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어떤 혼합 방식은 밝은 부분만을 분간할 수 있게 해주고, 어떤 혼합 방식은 어두운 영역과 밝은 영역을 뒤바꾼다. 이것이 보는 행위가 세계에 하는 일, 세계를 보는 동안 일어나는 일, 시를 쓰는 동안 무언가를 보는 방식과 닮았다고 느낀다.
시 속의 이미지들은 물질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기에 자유롭고 가변적이다. 존재를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는 이 이미지들은 매 순간 자기 자신을 전복하고 자발적으로 손상됨으로써 아무리 손상되어도 망가지지 않는 물질성, 혹은 비물질성을 획득한다. 물질을 재료로 삼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이미지가 가진 불완전함과 그것이 품고 있는 가능성. 그 가능성은 어디로 나아가고 또 휘발되면서 헛되고 덧없는 노력을 축적하는가. 상상력에 의존하는 이 이미지들, 읽는 이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통해서만 물질을 획득하던 이 이미지들에게 부피와 질량이 있는 물질을 재료로 주는 일은 무엇을 가능하게 만들고 무엇을 불가능하게 만들까? 이미지를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일은 어떤 맹점을 남길까? 이미지를 선명한 물질로 눈에 쥐여주는 일은 이미지를 해방하는 일에 가까울까, 가두는 일에 가까울까? 갇힌 이미지들을 다시 언어로 옮기는 일은 이미지에게 새로운 자유를 줄 수 있을까? 언어(비물질)-이미지와 시각(물질)-이미지는 서로에게 한 쌍의 기호가 아닌 입구로 작용할 수 있을까? 전자가 후자가 되는 과정은 재현의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할까? 전자와 후자가 쌍을 이룰 때, 둘은 서로의 재현이라는 설명 혹은 오명을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 사이에서, 작업은 ‘손’을 주요한 소재로 삼는 세 편의 시와 한 세트의 이미지를 출발점으로 삼아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된다. 물질로서의 손, 행위자로서의 손, 이미지로서의 손, 상징으로서의 손, 언어적 기호로서의 손, 노동의 주체로서의 손. 몸에서 가장 가느다란 뼈로 구성되어 있으며 얇은 피부로 뒤덮인, 뼈와 핏줄이 움직이는 방식을 반투명하게 드러내는 이 부분은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가장 섬세하고 복잡한 일들을 수행하는 데 주로 쓰인다. 때로는 기민하게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상징이자 기관으로 여겨지며, ‘손을 잡다’, ‘손을 놓다’, ‘손을 씻다’, ‘손을 더럽히다’와 같은 표현에서 쓰이듯이 언어 체계 안에서 특수한 기호로 작동하기도 한다. 첫 번째 축에서는 이렇게 시 내부에서 비물질성의 이미지로 또는 상징이나 언어적 기호로 존재하는 손에 물질을 덧입히기 위해 손을 동원한다. 두 번째 축에서는 그림, 사진, 조각 등 시 바깥에 물질성 이미지로 존재하는 손을 무작위로 수집하여 듬성듬성하게 혹은 조밀하게 나열하고 이것을 다시 비물질성의 이미지로 변환하기 위해 손을 동원한다. 각각의 과정에서 손은 스스로 오브제가 될 수도 있고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종이를 접는 등의 노동을 수행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첫 번째 축에서는 『투명도 혼합 공간』에 수록된 「관광: 씻은 손」, 「관광: 씻긴 손」 연작과 「사실은 느낌이다」를 중심으로 한 편의 시가 가진 레이어를 겹겹이 뜯어내고 각각의 겹에 물질을 부여하는 과정과 결과를 전시한다. 세 편의 시에서 창문은 공간에 빛을 개입시키고 안팎을 구분하는 동시에 실내의 풍경을 교란시키는 존재로 등장하며 손을 비춘다. 시각문화 연구자 윤원화의 표현에 의하면 창문은 “벽면을 차지하고 시선을 끈다는 벽면을 차지하고 시선을 끈다는 점에서 그림의 잠재적 경쟁 상대이며, 실제로 많은 창문들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바깥 풍경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액자로 작동한다. 전시장의 창문을 그대로 남겨둔다는 것은 창밖으로 보이는 동네의 성격과 그 건물의 역사를 앞으로 열릴 전시들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손을 위해 창문을 열망하는 두 편의 시, 「관광: 씻은 손」, 「관광: 씻긴 손」을 위해 전시 공간의 깨끗하고 무결한 흰 벽에 창문을 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바깥을 통해 실내의 풍경을 교란시키고, 손과 눈이 바깥을 향하게 만드는 일은 어떤 과정을 필요로 하며 어떤 결과를 도출할까.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작업실은 보도의 은행나무와 맞닿은 덕에 초록빛으로 가득 차는 커다란 창을 가졌다. 이 창문 앞에서 매일 손을 씻고, 손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 씻은 손을 기록하고, 모든 과정을 마친 후에는 그날그날 떠오르는 생각을 종이 위에 쓴다. 속기하듯 빠르게. 씻고, 씻긴 사물로 이미지 안에 머무는 손과 모든 과정을 행하는 노동의 주체로서의 손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게 될까. 창문 바깥의 풍경을 벽면으로 옮겨 놓는 일, 벽면을 차지하고 시선을 끌며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이미지는 창문을 대리할 수 있을까. 「사실은 느낌이다」에서 ‘손가락 하나로도 망쳐버릴 수 있는’ 것이기에 손댈 수 없는 사물 만들기를 수행하는 과정은 손을 어떻게 동원할까. 이렇게 만들어진 연약하기 짝이 없는 사물들은 어디로 갈까. 완성된 사물을 다시 해체한다면 손이 수행한 노동의 흔적은 어떻게 남겨질까. 이것을 망가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전시는 오브제 대신 오브제로 이끄는 의미와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이 손에게 어울리는 일이므로.
두 번째 축에서는 지난 일 년 남짓 수집한 손 이미지들—날카로운 도구를 쥐거나, 글을 쓰거나, 불을 피우거나, 불을 쥐거나, 손을 잡거나, 손을 씻거나, 다른 몸을 쥐거나, 빛에 관통당하는—을 각각 한 겹의 레이어로 삼아 물질성의 또는 비물질성의 이미지로 변환하고 이를 쌓아 한 장의, 또는 한 편의 결과물로 만드는 과정과 결과를 전시한다. 각각의 레이어는 언어를 재료로 만들어질 수도 그림이나 사진, 데이터를 재료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 각기 다른 상황과 맥락에 놓인 채 각기 다른 동작을 수행하며 서로 다른 도구처럼 기능하고 있는 손들은 어떤 방식의 포개짐을 통해 하나의 결과물이 될 수 있을까. 혹은 없을까. 모든 가능성과 성공과 실패가 중첩된 이미지를 위해 손은 무엇을 수행했을까. 그 이미지는 손을 어디로 데려갈 수 있을까. 전시는 오브제 대신 오브제로 이끄는 의미와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이 손에게 어울리는 일이므로.
- 김리윤 개인전 《새 손》, 2023.8.25 ― 2023.9.16, 전시공간 리:플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