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속도
네가 숲이라고 부른 새카만 배경에서
거의 무한하도록 컴컴한 숲속에서 너는
커다란 나무의 터무니 없이 조그만
둘레가 되려는 것처럼
거대한 세쿼이아 나무를 안고 있다 사실
그냥 광폭한 어둠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빛이란 빛은 모두 나무에 포획된 채로 있었는데
컴컴한 화면에서
나무를 껴안은 네 얼굴의 일그러짐 만이
너무 잘 보였다
네가 껴안으려 애쓰고 있는 것이 사실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사실은 알고 있는 것 같은 얼굴
사진 찍히는 것을 알고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는 얼굴
오래된 나무가 있는 장소는 오래된 장소가 된다
죽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을 나무에게 몽땅
다 줘버린 텅 빈 얼굴이
뭘 닮은 것도 같다고 생각했는데
사진첩을 뒤지다 그것이
어느 새벽 안방 창문을 열었을 때
캄캄한 하늘에서
천천히
하강하던
새하얀
비닐봉지라는 걸 알았다
겁에 질린 듯 구겨져 희게 빛나던 것
빛을 내던 것
우리는 이 아파트에서 오래 살았다
16층 창밖에서 흔들리는 나무의 중심부
잎사귀 사이로 드는 빛이 너의 얼굴에
날아가는 비닐봉지의 형상을 닮은
그림자를 만들며 움직인다
창밖에선 나무가 우리를 계속 오래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