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심포니
공원의 절반은 어둡고 절반은 밝다. 절반은 구름 그림자에, 절반은 빛에 덮여 있다. 구름 그림자와 빛의 경계가 서로 겨루며 이쪽저쪽으로 흐른다. 흐르는 곳에 앉는다. 내 몸의 표면이 절반은 어둡게, 절반은 밝게 변한다. 경계는 출렁이며 계속해서 절반의 모양을 바꾼다.
책을 펼친다. 흰 종이와 검은 글자가 서로 겨루는 듯하다. 종이와 글자가 각자의 상대가 되어주고 있다. 책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흐른다. 나는 여기와 저기를 구분할 수 없고, 구분할 필요 없다고 느낀다.
하나의 공원에는 여러 개의 얼굴이 있고 하루에도 여러 번 얼굴을 교체한다. 나는 앉은 채로 이 얼굴에서 저 얼굴로 느리게 교체되는 공원의 운동을 본다. 그 얼굴 안으로 걸어 들어가 보려 하지만 이미 다른 얼굴이 되어 있다.
하물며 이 공원과 저 공원은 더욱 다르다. 이 공원과 저 공원은 거의 다른 세계다. 공원에서 공원으로 이동하는 일은 다른 세계로 가는 일과 같아 부담스럽고 그래서 하루에 두 개의 공원을 가는 일은 잘 없다. 하루에는 오직 하나의 공원만. 공원에 하루가 담길 수 있도록. 혹은 공원이 하루에 담길 수 있도록. 공원을 시간 단위로 기억할 수 있도록.
공원은 너무 커도 공원답지 않고 너무 작아도 마찬가지다. 적당한 공원의 크기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자연임을 드러낼 만큼 작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무가 있을 만큼은 커야 한다. 모든 나무를 기억할 수 없기에 갈 때마다 초면인 나무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나와 아는 사이인 몇 개의 공원들이 있다. 낯설고 낯익은 나무들, 윙윙대며 머리카락에 앉는 벌들과 몸을 비트는 구름들. 그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볼 때, 공원에 드리워지는 붉음이 내가 가져온 책 위에도 드리워진다. 흰 종이와 검은 글자 위로 공평하게 쏟아지는 붉음. 그림자까지 뒤덮는 붉음.
공원에서의 하루가 끝나갈 때, 이 뒤덮임을 놓아버리고 싶지 않을 때 말러 심포니 5번을 듣는다. 음반의 색 때문일까? 나는 이 음악을 왜인지 붉다고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