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회와 궤적
‘개와 함께 걷기’는 내가 한 가장 성실한 움직임이며 행위 자체가 당위가 되고, 아무런 의문 없이 수행할 수 있는 동사다.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생활의 구성품 대부분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이동하거나, 변화를 겪었지만 개 산책만은 나의 하루에 건설된 튼튼한 기둥처럼 같은 간격과 부피를 가진 채로 같은 위치에 있다. 외래종 나무와 외국어, 외국인으로서의 나, 날씨 등등 낯설지 않은 것이 없는 장소에서 이 산책 기둥은 생활을 이루는 지면과 천장을 지지하는 동시에 둘 사이에 적당한 간격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날의 날씨나 개의 기분 같은 변수가 개입하여 매번 다른 세부가 더해지지만, 대체로 산책은 몇 가지 버전의 경로와 반환점을 두고 그 안에서의 배회를 동반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7월, 우리가 가장 선호하는 궤적은 집에서 전철로 10분 거리에 있는 크고 아름다운 호수 슐라텐제(Schlachtensee) 주변을 따라 걷다가 비어가르텐을 반환점으로 두고 머물다 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주로 물가의 산책로를 따르기를, 개는 오른편의 숲을 종횡으로 오가기를 선호하는데 우리는 이따금 서로에게 이끌려주고 서로를 기다리며 걷는다. 개와 나의 발아래서 사박사박 무너지는 눈 소리가 우리와 동시를 이루던 산책은 이제 수영하는 사람들이 물을 헤집는 소리, 새소리,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 같은 것들이 우리와 어긋나며 포개지는 것이 되었다. 이 산책에 언제나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 단절로 느껴지지 않는 한 쌍의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 한 쌍의 시작과 끝은 집으로 인해 발생한다. 우리의 의지나 결정보다도 집과 몸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한 시작과 끝. 집이 산책을, 산책이 집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서로를 증명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산책 가자. 이제 집에 갈까? 산책은 집과 몸에 의해 가능한 것이 된다. 그리고 개에 의해 가능을 가능하게 해야 하는 것이 된다. 집은 어떻게 가능해질까? 물론 아주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물리적인 공간이 필요할 것이다. 안전하다는 느낌이 필요하고, 돌아간다는 감각이 필요하고, ‘집’이라는 호명이 필요하고, 시간…… 시간이 필요한 것 같지만 그것이 꼭 두텁게 중첩된 시간일 필요는 없다. 기억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기억이 있는 듯한 착각으로 충분한 경우도 있다.
약 14시간의 비행과 4시간의 기차 여행을 마치고 베를린 중앙역에 도착한 것은 지난해 12월 31일 밤이었다. 우리는 베를린의 새해 전야가 어떤지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광란의 불꽃놀이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예약해 둔 택시를 타기 위해 짧은 길을 걷는 동안에도 지면 곳곳에서 폭죽이 터졌고, 바짝 긴장한 채로 개의 가슴줄과 연결된 끈을 꽉 쥔 채 걸었다. 집까지 가는 동안 택시 기사는 조금 전 찍은 영상이라며 도로 곳곳에서 차들 위로, 차들 사이로 폭죽이 터지는 것, 도심의 커다란 수도관이 파열되어 물이 넘치는 와중에 불은 불대로 타고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이렌 소리가 요란했다. 물론 화면 바깥의 우리가 속한 장면 역시 화면 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달리는 차 안팎으로 폭죽이 넘치며 평소의 도시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속도를 늦추었다가는 우리를 집어삼킬 것 같은, 산사태 같은 폭죽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독일에서는 폭죽 사용이 법적으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실베스터(Silvester)라 불리는 새해 전야에 한해서만 민간 폭죽 사용이 예외적으로 허용되는데, 이는 중세 유럽의 민속 신앙에 따라 시끄러운 소리로 악령을 쫓고 새해의 복을 부른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이 정도의 소음이라면 쫓겨 나가는 것이 악령만은 아닐 것 같은데, 이후에 베를린의 친구들에게 들은 바로는 실제로 반려동물이나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연말에 베를린을 떠나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쨌거나 우리는 악령도, 인간도, 동물도 베를린에서 쫓아내는 폭죽을 향하여 새해 전야에 베를린으로 온 셈이다.
광기 어린 폭죽 속에서 개와 고양이에 커다란 여행용 가방까지 동반하고 겨우 집에 도착한 밤, 당시 임시 침대였던 거실 소파에 앉아 떨며 겁에 질린 눈동자로 꼼짝하지 않으려던 개는 이제 집을 안다. 이 공간이 집임을 알고, 산책 후 현관에서 몸 털기를 알고, 밥때가 되면 초조하게 기다리는 곳이 부엌문 앞임을, 목욕할 때는 욕조에 앞발 두 개를 올린 채 기다리면 들어 올려 준다는 것을 안다. 개에게는 이 공간을 집으로 두기 때문에 발생한 습관들이 있다. 산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 산책이 얼마나 이어질지를 가늠하게 하는 지표(이를테면 전철을 타거나 타지 않는 것)가 있다. 내게도 그런 것들이 있다. 엔슐디궁, 당케 슌, 챠오 같은 말들이 가진 소리를 입안에 가두며 동그랗게 말아 던지는 듯한 발음. 날씨가 너무 나쁘지만 않다면 호수에 가서 개와 걷고 비어가르텐에 앉아 무알콜 맥주를 마시며 일하는 것. 선을 구성하는 점과 점 사이의 간격을 벌려 들여다보듯 이 문장들을 비집고 들어가면 보일 세부들. 그만큼의 공간과 시간, 그 안에서 행한 움직임, 움직임의 궤적이 우리 안에 쌓여 있다. 계속 수정되는 중심을 향하면서 우리의 머리통 위에 켜켜이 쌓이는 이상한 모자처럼. 집이라는 느낌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 될까?
이곳에는 쌓인 시간이나 궤적 없이도 ‘집이라는 느낌’이 있고, 개는 때때로 두꺼운 거실 벽 표면을 파고드는 냄새를 틈새로 만들어 코를 들이밀고 다른 외부와 접촉한다. 며칠 전 도심을 걷던 중 개가 갑작스레 여기서 더 가지 않겠다고 고집스레 주저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다 우리가 한식당을 막 지나치려던 참이라는 걸 알았다. 못 이기는 척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았더니 개는 당당하게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붐볐고, 소음 뭉치가 되어 공간의 일부를 차지한 외국어 사이로 직원들이 나누는 한국어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곳에서 듣는 한국말은 홀로 배경에 섞이지 못하는 흙바닥에 꽂힌 조화처럼 유별난 해상도로 솟아난다. 우리도 한국어로 김치전과 잡채, 겉절이를 주문했고 포장한 음식은 야외극장에서 영화 시작을 기다리며 맥주와 함께 먹었다. 대단한 음식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원래 목적지였던 피자집을 잊을 만큼 맛있게 느껴졌고, 먹으면서 미역 줄기 볶음이나 잡곡밥이 잡채와 함께 나오는 이런 양식의 식사가 그리웠다는 걸 알았다. 비가 내렸고 하나둘 펴지는 우산 사이로 영어와 독일어와 빗소리와 김치전 냄새가 뒤섞이고 있었다. 자신이 먹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개는 평소보다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개에게 한식당에서 퍼지는 음식 냄새, 한국인 직원들이 뱉는 익숙한 소리의 언어, 미세한 체취 같은 것들은 타국의 두꺼운 벽을 찢고 틈새를 만들어 개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열린 문을 만드는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추측, 이런 비유는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고 나는 개 앞에서 자주 나의 인간됨이 부끄러워진다. 모르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비유를 동원하고야 마는 것. 언제나 언어라는 외피를 덧입으려 하는 것. 할 줄 아는 이 나라의 언어라고는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가 거의 전부인 채로 생활을 시작하면서 얻은 것은 말이라는 구조가 무너진 장소를 떠도는 인간으로서의 곤경과 막막함이었다. 동시에 기호로 작동하지 못하고 소리로 떠도는 말들 사이를 부유하는 인간으로서의 텅 비워진 자유 같은 것이 있었다. 비유는 우리를 속박하고 착각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유 대신 착각을 사용할 수 있을까? 이것이 내가 요즘 겪고 있는 질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누구나 모자를 쓰고 다니는, 그리고 한 번이라도 모자를 써보면 왜 모두가 모자를 쓰고 다니는지 알 수 있는 겨울에 베를린에 도착했기 때문일까. 그러니까 두개골 속까지 으슬으슬 떨려오는 것 같은 기묘한 질감의 추위에서 우리를 모자만큼 보호하며 안전하게 외부와 맞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없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모자를 뒤집고 뒤집는, 뒤집힌 모자를 집이라고 호명하거나 호출하는 시를 연속적으로 쓰고 있다. 비니나 버킷햇처럼 머리를 푹 감싸는 형태의 챙이 없는 모자라면 그것은 이쪽으로 뒤집어도, 저쪽으로 뒤집어도 모자로 기능한다. 우리의 머리통에 씌워지기에 부족함이 없다. 집은 닫힌 보호의 공간이라기보다 외부와 통함으로써 안팎을 구분 짓는 벽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안전하다는 감각을 주는, 연약한 내부에 가깝다. 집은 돌아가는 곳이라기보다 돌아가려는 움직임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다. 또 집이란 정주의 장소가 아니라 이동과 착각, 오차와 뒤섞임 속에서만 간헐적으로 경험되는 환상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현실이 아주 얇고 연약한 만큼 환상 역시 적어도 현실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는 얇지만 부드러운 것, 연약한 채로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의 영원만큼.
몸이 행하거나 속하는 반복, 촉감과 소리와 장면, 매일 똑같이 시작되고 끝나며 시작과 끝 사이의 간격을 다른 세부로 채우는 산책은 환상을 감각으로 지지한다. 걸음의 반동에 따라 가볍게 펄럭이는 귀, 익숙한 산책로의 매일 다른 냄새, 배회와 궤적, 되풀이되는 움직임, 우연인 것처럼 생겨나는 리듬. 그런 것들이 이 얇고 부드러운 환상의 가장자리를 매만진다. 현실의 세부를 적당히 뭉뚱그리고 흐릿하게 하는 먼지 낀 기억력 덕분에 이 시간과 저 시간을 연결할 수 있다는 것. 집이라는 말로 시작과 끝은 동그랗게 연결한 끈이 된다는 것. 이 원의 안팎을, 위를 개와 내가 배회할 수 있다는 것, 이 원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산책이 있다는 것.
이제 집에 가자.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바깥을 감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막으로서의 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