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선택으로서의 경계
새는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커밍아웃했을 때 자신의 시체를 보여주었다. 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소년이거나 소녀이거나 둘 다 아니라거나 하는 문제보다, 살아 있는 몸과 죽어 있는 몸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크고 무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실은 가지고 있다기보다 놓치고 있는 쪽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여자도 남자도 다 놓치고 있듯이. 새는 날갯죽지 아래로 삶과 죽음이 동시에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곤란했을 것이다. 나는 대충 ‘논바이너리’(바이너리binary의 부정형에 불과할지언정)라는 단어를 써먹거나 나의 대명사를 they라고 불러달라거나 하는 식으로 존재를 호소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 있는 상태를 뭐라고 부른단 말인가?
새는 유령도 좀비도 아니었고 그냥 자기 시체를 가지고 있는 새였다. 새는 시체를 어디에 보관하고 있었을까? 대충 두었다가 부패해 끔찍한 냄새가 난다면 들키기 십상일 것이고 경찰에 잡혀갈지도 몰랐다. 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 앞에서 새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새를 죽이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범죄가 아닙니다. 동물보호법 위반일까요? 하지만 맨날 치킨을 먹는 사람들은요? 게다가 이 시체는 저 자신이기도 합니다.”
도시에 살지 않는다면, 새에게는 새만의 무인도가 있어 그 섬에 자신의 시체를 오백 구 쯤 펼쳐놓았을지도 모른다. 햇볕에 말라가는 새의 시체들······ 새는 해변에 널려 있는 시체들 위를 비행하며 모두 잘 마르고 있나, 그런 걸 살펴보았을지도 모르고······ 그중 하나의 빠진 눈알을 다시 끼워 넣었을지도 모르고······
내가 여성학 교수님을 찾아갔듯이, 새는 언어학 교수님을 찾아간 적 있다고 했다.
“자네 이름은 새인데 영어로는 bird이거나 sae이거나 say일 수도 있고 그중 하나를 택하면 되는데, 불어로는 sé라는 사실 역시 기억하게나.”
세상에는 타밀어도 히브리어도 뱅골어도 있었지만 새는 제2외국어까지만 공부하기로 했다. 할 줄 아는 언어가 많아진다는 건 해외여행 갈 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늘어난다는 뜻이었고 곧 세계 어디에서든 말 같은 것이 들릴 때에 귓속의 침묵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새는 대부분의 외국어를 쏼라쏼라 정도로만 번역하고 싶었다.
자신은 삶과 죽음 사이의 논바이너리 같은 거라고, 경계는 어떤 종류의 침묵이라고, 새는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시체는 어디서 났니? 묻지 않았다.
실은 우리가 양쪽을 놓치고 있다기보다 놓아버린 쪽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편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새는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도 새의 날개를 두드렸다.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