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꺼풀 안쪽의 붉음
이 사진, 제가 아마
네 살? 다섯 살?
기억나요 엄마가
할머니 오실 거야
오실 거야 오실 거야
그렇게 말했고 기다렸어요
오실 거야 오실 거야
엄마 목소리가 부엌에
윙윙 울리는데 엄마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어요
할머니는 아직
안 왔어요 현관문은
닫혀 있었고, 부엌 작은 창으로
빛이 들어왔어요
바닥에서 흔들리는
네모난 빛이랑 놀았어요
손도 넣어보고
얼굴도 대보고 따뜻했어요
오실 거야 오실 거야
그런데 할머니가 정말
오신 거예요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엄마가 먼저 오거나
영영 혼자 있거나
뭐 그럴 줄 알고
그냥 빛이랑 놀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들어왔어요
현관문이 열렸는데
글쎄 할머니가
코피를 흘리고 계신 거예요
코피를
줄줄줄
빨간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어요
할머니가 이쪽으로
달려왔어요
수건인가 행주인가
꺼내서 코를 막고
그런데 그 밑으로도
뚝뚝 떨어지고
싱크대에도 할머니 흰 옷에도
네모난 빛의 안쪽에도 핏방울이
떨어졌어요
흐르는 피를 닦으며
할머니가 웃었어요
기억나요 이 사진
아마 네 살?
다섯 살? 아닐 수도 있어요
제 착각일 수도 있어요
그냥 우리 집에 놀러 온 할머니가 저를
안고 있는 사진일 수도 있어요
사진 속 창밖의 날씨가 좋아보여서
제가 다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근데 저는
피를 그때 처음 봤거든요?
어린애가 피를 볼 일이
딱히 없었을 거 아니에요?
피가 너무 빨갛고 그래서
기억하고 있는데
아닐 수도 있어요
내가 모자를 쓰고 있는 걸 보니
외출했다돌아 온 걸 수도 있고
사진은 누가 찍어줬겠어요 엄마나
아빠였겠지
할머니랑 둘이 있던 건 아니었겠지
그런데도 제 기억은 그래요
사진 속 이 날
나는 처음 피를 보았다
내 삶의 첫 번째 피였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빛 속으로 떨어지는 피
저는 그런 건 그날 이후로 본 적이 없어요
🩸
🩸
이런 핑크빛은 하루 중 아주 잠시 동안만 볼 수 있는 하늘의 색이며 아예 볼 수 없는 날도 많다. 노을 직전의 저것을 핏빛 하늘이라고 부를 수 있나? 그럴 수 있다면 그 시각 한강 공원에 영문 모른 채 놓여 있는 라디오,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직육면체, 메탈 소재, 크고 버튼이 많은) 라디오에서 송출되는 음성이 있었을 것이다. 멀리까지 울려 퍼졌을 것이다. 누군가 그것을 듣고, 채록했을 것이다. 놓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