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이라는 연주
지난 6월 대구 하이마트 음악 감상실에서 김리윤 시인과 함께 낭독회를 했다. 시인들에게 낭독회는 익숙한 행사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특별했는데 오래된 음악 감상실이라는 장소 덕분이었다. 하이마트 음악 감상실은 한국 전쟁 이후 1957년 개관한 공간으로 67년째 성업 중이다. 무대 뒤의 스테인드글라스와 클래식 작곡가들의 얼굴이 커다랗게 부조되어 있는 벽면이 세월의 흐름을 드러내고 있었다.
음악이 드물었던 시절, 전후의 척박한 도시에서 이곳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특별한 위안을 건네 왔을지 상상하며 몇 편의 시를 낭독했다. 67년 동안 다양한 필체로 적혀 왔을 숱한 제목의 신청곡들은 당대의 음향기기를 통해 재생되며 공간을 진동시켰을 것이다. 진동은 찾아온 사람들의 귀에 닿아 감정과 움직임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낭독회가 있던 날에는 시를 읽는 목소리가 음악 대신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1957년부터 하이마트 음악 감상실에 축적된 음악의 파장을 기록한 가상의 공책이 있다면 낭독회의 시간은 음성화된 문학이 만드는 독특한 모양의 파형이 그려진 한 페이지로 남겨졌을 것이다.
몇 년 전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클래식 피아노를 배우는 동안 산문집 『미지를 위한 루바토』를 썼다. 시를 촉발하는 순간의 인식과 감정에 집중할수록 연주의 순간에 몰두하는 피아니스트의 루바토처럼 자연스러운 언어적 운동이 발생한다는 것이 글의 골조였다. 피아노와 시는 세밀하고 깊은 층위에서 많은 부분 닮아 있어서 그 둘이 서로에 대한 모종의 비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중 시 낭독이라는 행위는 음악이라는 축을 통해 들여다봤을 때 발견 가능한 고유하고 유별난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현대시가 보통 종이 위에 배치된 언어의 형태로 생산되고 유통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반면 낭독회는 인쇄된 글이 인간의 목소리에 의해 공연의 형식으로 물질화되는 시간이다. 종이 위에 적힌 글자들이 음악의 구성 요소인 음표들 혹은 음표가 나열된 악보와 같은 위상으로 가라앉고, 시를 읽는 목소리가 연주되는 음악의 역할을 맡는다. 문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종이 위의 반영구적인 기록물을 시라는 장르의 총체라 여기지만, 낭독회라는 시공간에서만큼은 이 관계가 역전되고 시의 범주가 확장된다.
‘음악’이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어떤 방식으로든 물리적으로 상연되거나 연주되는 소리? 악보라는 사물 혹은 악보를 통해서 상상된 머릿속의 소리까지를 음악이라고 통칭할 수 있을까? 조성진 피아니스트가 쇼팽 발라드 4번에 대해 설명하는 영상에서 우리가 이 곡을 시작하지 않으며, 곡은 이미 시작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는 도입부는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에 따르면 음악은 실제로 연주되는 시간의 앞뒤를 넓히며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 현대에 보편적으로 상상되는 음악이라는 대상은 보통 악보를 통해 기록되거나 예비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일정한 시간을 점유하며 연주되는 것이다. 종이에 적힌 시가 악보와, 낭독의 행위가 연주와 유비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면 낭독을 통해 시는 시간의 앞뒤를 넓히는 방식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다소 진부한 구문을 빌려오자면 ‘종이를 찢으며’ 공간 속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시 낭독회는 클래식 공연의 몇 백 분의 일 수준으로 적은 수의 관객과 함께 이루어지는 작은 행사들이다. 문학 독자 중 가장 적은 지분을 차지하는 시 독자들 중에서도 직접 현장에 찾아오는 이들의 수는 더욱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시를 가장 많이 읽고 쓰는 나라 중 한 곳임에도 그렇다. 그러나 이 깊고 확고한 소수의 열정이 나는 거의 멸종위기에 이른 시라는 장르의 자율성과 아름다움을 가능케 하는 적당한 양의 에너지라고 느낀다. 낭독회는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은밀하고 섬세한 공연이다. 클래식 음악의 애호가라면 누구나 시 낭독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문학과 음악 사이에서 교환되고 비유되는 것들은 유구하게 존재해 왔으며, 우리가 그것들을 함께 사랑해온 역사가 분리하여 사랑해온 역사보다 더욱 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