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라비 그리고 물질과 기억
끄라비······라는 곳에 왔다.
"저는 이런저런 잡념이나 소망, 모르는 사이에 달라붙은 사회 활동에 대한 혐오와 애착 등을 모두 버리고 문을 닫습니다."
누군가의 트위터에서 본 이 문장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중이다. 문을 닫는다. 나는 문을 닫고 싶은가 보다. 문이란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 아닌 문이 있는가? 죽음은 문인가? 아, 명상을 멈췄으면 안 됐다. 명상은 유일하게 경험 가능한 문 너머의 장소인데.
시작 노트를 써둘 걸. 여기 오기 전에 썼던 '원의 갈등'이라는 제목의 시가 어떻게 쓰였는지 다 까먹어버렸다. 퇴고 불가능. 게다가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 '물질과 기억' 쪽이 더 좋은가?
여기까지 쓰고 다시 읽어보았는데 '물질과 기억' 쪽이 아무래도 좋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질감. 질감은 의미화되지 않는다. 의미 이전의 질감을 만들기 위해서 재료가 필요하다. 재료, 재료는 이미 제공되어 있다. 하나의 시에 앞서 쓰인 시가 그 재료다. 시의 재료가 시가 아닐 수가 있나.
공항에서 리조트까지 차와 배를 타고 왔다. 선착장에서 선착장까지 롱테일보트를 타고 이동했는데 하늘이 무척 어두웠다. 별이 많았고 많은 별들이라면 이제 익숙하지만 밤바다를 가로지르머 밤하늘을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그 별들이 나에게로 올 수 있었다. 기억으로 글을 쓰는 만큼 글을 통해 기억한다. 다르게 기억하기 위해 글쓰기를 왜곡해 본다. 아니 왜곡이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곡 아닌 것이 있는지도. 도착한 곳은 아름다웠다. 분 가 타이 리조트? 분 가 타이? 분 가 라이? 틀렸을 수도 있는 이름이다. 이곳의 이름이 잘 외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의 풍경은 외웠다. 바람도 외웠다. 다 잊어버릴 것이지만. 지금은 내가 외우고 있는 몸들을 본다. 수영장 근처에 엎어져 있는 몸들. 젖거나 잠들거나 둘 다인 몸들.
이곳에 와서 수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수영을 독학했다! 리윤에게도 가르쳐 주었다. 둘 다 어색한 평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개헤엄을 익히고 싶은데 물 속에서 고개를 드는 것은 아직 쉽지 않다. 하지만 곧 할 수 있을 것 같아. 물 안에서 물의 질감을 느끼며 아무것도 잊을 수 없었다. 물의 질감이 나의 경험 위에 쌓일 뿐이었다. 쌓인 것들 중 어떤 층위를 마음에 들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면 기쁜 것이겠다. 물 밖은 물 안에 있다. 해변에는 죽은 해파리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아구아 비바!"라고 외쳤다.
그리고 악몽을 꾼다. 악몽은 내 삶의 층위다. 얼마 전에는 죽는 꿈을 꿨다. 깨어난 나에게 그런 생각은 동시에 자유롭기도 하지 않아? 라고 누군가 물어보았는데 그건 깨어 있을 때의 생각이고, 잠을 자며 죽는 꿈을 꿀 때에는 두려움뿐이다. 꿈은 원래 하나의 감정만 느끼게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아 진짜 사라지는구나, 무섭다 무서워, 이 생각을 하며 죽었다.
다른 꿈에서는 손가락에 화상을 입었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며 내게 안겨 엉엉 울던 아빠에게 커피를 내려주려던 참이었는데, 커피 기계에 손을 데이고 말았다. 순식간에 물집이 차올랐다. 다친 손의 감각이 너무 선명해서 일어났을 때까지 손가락이 얼얼했다. 뭐냐, 뇌? 어떻게 이런 걸 구현할 수가 있는 거냐? 이런 말을 중얼거렸고.
잔잔한 절망 속에서 나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수영 시킨다. 새카맣게 탔다. 달라진 건 없다. 그래도 따뜻한 곳이라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