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징후
작고 어둑한 우리의
방에서 책상 스탠드를 켰을 때 흰머리가
무슨 귀중한 물질처럼 빛나고 있었지
우린 서로의 새치를 뽑아주기 시작했는데
네게 흰머리가 너무 많았어
많아도 너무 많았어
머리통 전체가 아주 진귀하고 영험한 물질처럼 빛났어
이제 내 차례라고
돌아앉은 너는 어느새 흰 털로 뒤덮인 개였다
작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허옇게 김 서린 소리였다
무성한 안개였다
두 사람의 뒤섞인 흰머리였다
초록색 방수페인트 위로 얇게 쌓인 눈이었다
기억을 가로지르는 실금이었다
장면에 낀 개털이었다
영혼의 더께였다
자전거를 덮어둔 비닐이었다
눈을 감으면 펄럭이는 얼굴이었다
먼지 낀 시간이었다
두 사람의 손이 뽑아낸 흰머리였다
구름이 인쇄된 포스터 뭉치였다
땅에 떨어진 구름이었다
광택이 도는 종이에 인쇄된 윤기 나는 백사장이었다
우산 밖으로 삐져나온 팔의 축축함이었다
돌무덤 위에 부숭부숭 돋은 서리였다
우리 개의 수염과 너의 흰머리가 뒤엉킨 더미였다
그런데 왜 수염이 몽땅 빠져 있는 거지?
눈을 도울 수염을 모조리 잃은 것 치고는 너무 밝은
눈으로 나를 보는 개가
뽑은 흰머리가 더미를 이루기엔 너무 젊은 네가
아니면 내가
서로의 등을 보며 앉아 있고
흰 개에게는 흰머리가 너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온몸의 털이 하얗게 새버린 개가
자꾸 작아졌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밥을 먹고
산책하는 동안에도
산책하는 법을 걸음마다 더 잊으면서
목줄을 헐겁게 만드는 크기가 되면서
영원을 알아버린 것처럼 겁에 질린 얼굴로
개를 잃어버린 영원처럼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본다
잠든 동물은 잠에서 본 것에서 징후를 읽어내지 않는다
걷는 법을 잃어버리며 걷는
기억이 몸의 내용인 것처럼 점차 작아지는
목줄로부터 몸을 줄줄 흘리며 걷는 개를
나는 붙잡는다
다시 붙잡는다
더 붙잡는다
잠에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잠을 태우는 불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