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되는 무한, 시간의 헤테로포니 ― 이제니론
세계는 얼마큼 있는가? 이러한 질문이 가능하다면, 이는 세계를 설명하는 어휘의 수는 얼마인가 하는 질문과 유관한 것이다. 양적인 측면으로 접근할 때 세계는 측량 가능한 공간과 그 공간의 구성물로서 드러나고 이러한 측량은 언어라는 도구의 역량에 기대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세계와 언어는 모두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지만 측정의 시간을 한시적으로 통제한다고 가정했을 때 세계는 언어의 유한성, 이에 따른 감각의 유한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제한되며 그러므로 세계는 유한하다는 명제는 성립 가능하다. 그러나 세계는 유한하지 않다. 유한한 것은 인간의 언어이며 감각이다. 세계의 무한함을 인식하거나 표현하기에 인간의 언어가 부족하고 감각이 불투명하다는 사실은 어쩌면 시의 탄생 배경일지도 모른다. 시가 익히 알려져 있듯 무한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감응 방식이고, 시인의 일이 언어를 새롭게 배치하는 것이라면, 세계의 무한함은 세계를 관계적으로 파악할 때 인식 가능한 차원으로 끌어내려진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배치란 곧 새로운 관계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제니의 시는 이러한 언어의 배치를 통한 관계의 발생으로부터 세계의 무한성을 드러낸다.
거실에는 책상이 있다. 거실에는 의자가 있다. 거실에는 책이 있고. 꽃이 있고. 거울이 있고. 종이가 있고. 유리가 있고. 서랍이 있고. 약속이 있고. 한숨이 있다. 한편에는 식탁이. 한편에는 냉장고가. 냉장고 안에는 씨앗이. 씨앗 안에는 어둠이. 어둠 안에는 기억이. 기억 안에는 숨결이. 숨결 안에는 눈물이. 눈물 안에는 너의 말이. 너의 말 안에는 나의 말이. 나의 말 안에는 지나간 흔적이 있다. 우리의 감정이라 부르던 어떤 것. 우리의 취향이라 부르던 모든 것.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되었던 모든 것.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되었던 모든 것. 거실에는 어떤 모든 것이 있다. 어떤 모든 것 안의 어떤 모든 것. 모든 어떤 것 안의 어떤 모든 것. 기울어진 모서리. 희미한 벽지. 벽지에 닿는 손가락이. 손가락을 따라가는 눈길이. 이제는 없는 너의 눈길이. 되돌릴 수 없는 어떤 얼룩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번지는 모든 얼룩이. 거실에는 모든 어떤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모든 어떤 것 안의 어떤 모든 것. 어떤 모든 것 안의 모든 어떤 것. 우리를 다른 우리로부터 구별되게 하던 모든 어떤 것. 우리를 다른 우리로부터 구별되게 하던 모든 어떤 것. 우리를 다른 우리로 번지게 하던 어떤 모든 것. 거실에는 문이 있다. 거실에는 창이 있다. 거실에는 모자가 있고. 연필이 있고. 온기가 있고. 선반이 있고. 후회가 있고. 흔들림이 있고. 망설임이 있고. 독백이 있고. 양초가 있고. 구름이 있고. 한낮이 있고. 한탄이 있고. 나무가 있고. 풀이 있고. 물이 있고. 불이 있고. 웃음이 있고. 울음이 있고. 음악이 있고. 침묵이 있고. 그림자가 있고. 고양이가 있고. 개가 있고. 새가 있고.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이제는 없는 네가 있고. 이제는 없는 오늘의 네가 있고. 거실에는 어떤 모든 것이 있다. 있다. 있다. 모든 것 안의 어떤 것. 모든 것 안의 모든 것. 어떤 것 안의 어떤 것. 모든 것 안의 모든 것. 어떤 것 안의 어떤 것. 어떤 것 안의 모든 것. 거실에는 어떤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거실에는 모든 것이 있다. 있다. 있다.
- 「거실의 모든 것」 1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66쪽, 문학과지성사, 2014. 전문
베르그손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공간 속에 사물들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왜 과거는 사라진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 2앙리 베르그손 저, 박종원 역, 『물질과 기억』, 아카넷, 2005. 그에 의하면 과거는 사라지지 않으며 단지 현실성을 잃을 뿐이다. 위 시에서 ‘거실’이라는 익숙하고 협소한 공간이 어떻게 무한한 우주로 환원되고 있는지 살펴보기에 앞서 ‘실재하는 과거’란 무한의 한 양상임에 우리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가 세계의 일부로 편입될 때 세계는 역으로 현재를 잃게 되며, 이러한 시간성의 팽창은 그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백한 무한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베르그손의 말을 다르게 표현해 보자면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비가시성의 차원으로 변양될 뿐이다.
시는 가장 먼저 인접한 사물들을 나열한다. “책상”, “의자”, “책”, “꽃”, “거울”, “종이”, “유리”, “서랍” 등 균질한 사물들의 ‘있음’이 연속적으로 제시되다가 “약속”과 “한숨”이 등장하는 순간 미세한 균열이 발생한다. 물질명사에서 추상명사로 이동하는 계열 간의 낙차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 나열되는 단어들 간 내포된 차이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식탁”, “냉장고”, “씨앗”을 지나 씨앗 안의 “어둠”에 이르러 낙차는 극대화된다. 이때 가시성의 전환이 발생한다. “식탁”과 “냉장고”와 “씨앗”을 우리가 “식탁”, “냉장고”, “씨앗”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대상들의 표면을 시촉각적으로 감각하여 이를 다른 대상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씨앗 안에 존재하는 “어둠”이란 실재하나 감각할 수 없는, 감각의 극점을 넘어선 이면에 존재하는 대상이다. 비가시적 영역에 위치하던 ‘씨앗 속 어둠’의 존재는 시를 통해 재현되는 순간 가시적 영역으로 이동한다. 따라 읽던 독자들은 마치 몸을 작게 구겨 씨앗 안에 들어간 것처럼 그 어둠을 직접 보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되며 이면은 표면으로 돌출된다. 어둠은 뒤이어 “기억”을 촉발한다. 이때 “어둠”과 “기억”의 관계는 주관적이다. ‘기억은 어떠한 의미에서 어두운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어둠에 대한 기억이 있다’ 등 어둠-기억의 연결 계기에 대해 독자는 추측만을 할 수 있다. 시적 화자의 주관성이 내밀하게 개입하여 발생한 도약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자의 주관적 언술이 생성하는 여백의 공간은 독자 역시도 자신의 주관성을 개입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의 활로가 된다. 각각의 독자는 개별적 경험으로부터 “어둠”과 “기억” 사이의 연관을 도출하여 빈 곳에 채워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 이후로 “거실”은 비가시적인 것들을 스스로의 구성물로서 본격적으로 확충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확충을 통해 “거실”의 공간은 무한으로 확장된다. 이때 무한의 양상은 앞서 우리가 동의했듯이 비가시적 영역에 속해 있던 ‘실재하는 과거’가 가시적 영역으로 전환되며 시간성을 팽창시키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어지는 단어들을 살펴보자. “기억”, “숨결”, “눈물”, “너의 말”, “나의 말”, “흔적” 등의 대상들은 “안에는”으로 연결되며 그 심층으로 끝없이 깊어지는 형상을 그린다. “안에는”이라는 말은 대상의 이면이라는 공간을 제시함으로써 그곳에 또 다른 대상을 위치시키고 원 대상의 영향 하에 가시화한다. 이를테면 “기억 안에는 숨결이”라는 어구는 “기억”의 이면에 “숨결”이라는 대상을 위치시키고 이를 “기억”의 영향 하에 가시화한다. 이와 같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숱한 이면의 표면화가 발생한다.
위 시에서 “지나간 흔적”, 즉 과거란 “우리가 감정이라 부르던 어떤 것”, “우리가 취향이라 부르던 모든 것”이며, 이는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되었던 모든 것”이자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되었던 모든 것”이고, 동시에 지금까지 나열된 모든 대상이다. 과거가 현재일 때 모든 것은 나열되거나 말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가 감정이라 부르던 어떤 것”과 “우리가 취향이라 부르던 모든 것”은 그 자체로 현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원이었던 “너”가 부재하는 현재를 맞닥뜨린 화자, 즉 상실을 경험한 화자는 과거를 현재의 영역으로 회귀시키는 방법으로써 나열하기와 말하기를 택한다. 그러므로 “너”의 부재는 역으로 그가 존재했던 거실을 “모든 것”으로, 즉 무한한 공간으로 환원한다. 무한의 조건에서는 상실 역시 부재가 아닌 존재 상태의 변화를 양산할 뿐이다. 따라서 시의 말미에 “이제는 없는 네가 있고. 이제는 없는 오늘의 네가 있고”라는 발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시에 등장하는 비가시적 대상들은 선형적인 동시에 비선형적으로 나열되는데, 문장이라는 선형적 장소(혹은 비非-장소 3non-lieu. 원래는 법률 용어로서 ‘기소 면제’를 뜻한다. 그러나 푸코는 언어의 공간이 현실의 공간에 직접 연루되지 않는다는 뜻을 함축하여 사용한다. 이를테면 ‘장소 아닌 장소’다. (...) 언어는 사유의 분석, 즉 단순한 마름질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공간에 질서를 정립하는 활동이다. (미셸 푸코 저, 이규현 역 『말과 사물』 10쪽, 민음사, 2012. 옮긴이 주 참조.) ) 위에 나열된다는 점에서 선형적이며, 나열의 방식이 앞서 언급했듯 다차원적 관계 맺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비선형적이다. 선형성과 비선형성,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위태로움과 불안은 이 시가 관습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때의 ‘관습적이지 않음’이란 단어들 간의 위계가 붕괴되고 평등하게 배치된다는 의미와도 같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식의 차이는 없다. “다만 우리를 다른 우리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개별성과 “우리를 다른 우리로 번지게” 하는 통합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과거-현재’ 등의 시간적 계열체와 ‘물질명사-추상명사’ 등의 언어적 계열체, ‘존재-부재’ 등의 존재론적 계열체는 위계 없이 “거실” 속에서 개별적인 동시에 통합적으로 제시되며 위태롭게 공존한다. 이와 같은 질서 내에서 “거실”이라는 공간과 무한한 우주의 위계 역시 무화된다. 그러므로 “거실에는 모든 것이 있”다.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있다.
눈물 다음에 너울이 온다 너울 다음에 하늘이 있고 하늘 너머로 얼굴이 있다 얼굴 사이로 바람이 오고 바람 속에는 마음이 있어 마음 위로는 노래가 오고 노래 사이로 호흡이 있고 호흡 속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 너머로 구름이 있고 구름 너머로 저녁이 오고 저녁 너머로 안개가 있고 안개 너머로 들판이 있고 들판 너머로 먼지가 일고 먼지 너머로 거리가 있다 거리 속에는 정적이 있고 정적 사이로 언덕이 있고 언덕 위로는 나무가 있어 나무 다음에 눈물이 오고 눈물 다음에 너울이 있어 너울 너머로 노을이 진다
― 「너울과 노을」 4이제니, 앞의 책 45쪽. 전문
다소 비약처럼 들리겠지만, 너울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노을이 존재하고 있다. 세심히 주의를 기울인다면 누구나 너울이라는 단어를 통해 충분히 노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음성학적 유사성 때문이기도 하고, 이러한 유사성에 의해 ‘너울’보다 친숙한 단어인 ‘노을’을 자연스레 연상하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며, 위 시의 경우에는 시간 순으로 ‘너울과 노을’이라는 제목을 읽은 뒤 시의 내용에 진입하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너울’이란 바다의 크고 사나운 물결을 뜻한다. 위 시에서 거대한 물결을 ‘너울’이라고 발음하는 행위는 물결이 밀려오는 바다의 모습 중에서도 짙푸른 수면 위로 주황색 노을빛이 퍼져나가는 이미지를 소환하는 힘을 지녔다. 앞의 논증에 동의한다면 이 진술이 과장으로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니는 한 인터뷰에서 “어떤 구체적인 풍광이나 자연물, 혹은 어떤 특정한 대상으로부터 촉발된 무엇으로 시를 시작하지 않는 편이에요. '나무'나 '구름', '바람'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들여다본다기보다는 '나무', '구름', '바람'과 같이 어떤 사물들의 이름을 통해, 사물을 가리키는 낱말들을 통해 그 사물의 내부로 들어간다고 할까요”라고 말한 바 있다.
5이제니 시인 인터뷰 X 원모어백, 매거진 더콤마에이, 2015.
짐작해 보건대 “너울”이라는 낱말을 통해 “너울”의 내부로 들어간 시인은 그곳에서 “노을”을 발견했을 것이다. “너울”과 “노을” 외에도 숱한 단어가 제시되어 있는 위 시의 제목이 “너울과 노을”인 이유 역시 “너울”에서 시작되어 “노을”에 이르는 말의 놀라움이 이 시를 추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이러한 놀라움이 슬픔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눈물의 거센 물결인 너울로부터 강력한 소멸의 이미지인 노을에게로 가닿는 말의 여정이며, 이러한 일련의 수행이 가능해지는 ‘주체로서의 말’에 대한 경외와 이를 촉발한 시인의 민감한 언어적 감수성이 탁월하게 발현된 명편이다. 이제니의 작품들이 많은 경우에 기표의 말놀이 차원에서 논해져 왔지만
6“시라는 것이 ‘말과의 자유로운 놀음’이라는 소박한 진실을 이렇게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강동호, 「고통의 축제 – 전망도 회고도 아닌 삶」, 『문학과사회 95호』, 2011)
“이러한 고독한 여정은 재치 있는 말놀이의 과정과 함께 한다. ‘나는 정말 요롱이가 되고 싶어요. 요롱요롱한 어투로 요롱요롱하게’(「요롱이는 말 한다」), ‘완두는 싫다 싫어요/ 완두는 완두 완두 하고 울기 때문에// 당신은 완고하다/ 당신은 완고한 완두콩’(「완고한 완두콩」)과 같은 구절들은 통통 튀는 리듬감을 선사하기도 한다.”(이송희, 「유쾌한 말놀이의 방식」, 『열린시학』, 2011)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2010)에서는 노스탤지어의 감정이 강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때도 기표와 기의를 분리시키는 고유한 말놀이의 재기발랄함이 많이 언급됐지만, 기본적으로는 ‘페루’처럼 실제의 고향은 아니지만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먼 기원에의 갈망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에요.”(강지희, 「문학 초점 -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창작과비평 167호』, 2015)
“요컨대 이제니 시세계에서 주체의 억압된 무의식은 의미 없는 기표들의 놀이 혹은 무의미한 나선형의 파동으로 집중 발현된다.”(이진경, 「나선의 숲에서 부유하는 시어들」, 2018)
, “너울”과 “노을”의 병치를 통해 발생하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상호작용은 전술한 바와 같이 그 층위가 단순하지 않으며 서로 교환되고 혼재되는 양상을 보인다.
언어의 배치를 통한 관계의 새로운 발생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우리는 앞서 「거실의 모든 것」을 통해 알아보았다. 「너울과 노을」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이 시가 표면적으로는 동일 계열의 위치어(다음에, 너머로, 사이로, 속에는, 위로는)를 통해 명사 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동사(온다, 있다, 일다, 진다)를 통해 명사에 상태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관련하여 입체적 이미지에 천착한 조강석의 논의.
7이 시는 공간을 묘사하고 시간을 극화하는 태연함 속에서 감각의 착란 혹은 착오를 일으킴으로써 리얼리티를 강화하는 묘한 효과를 발휘하는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쉽게 말하자면 “너머”라는 말이 환기하는 공간감과 “다음”이라는 말이 환기하는 시간 의식이 효과적으로 공존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시의 입체감을 부각시키는 것은 또 있다. “있다”라는 말이 환기하는 존재감과 “온다”라는 말이 환기하는 사건의 현장감이 공존하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떤 추상을 보게 하고 오히려 구체적인 것을 배경으로 돌리게 하는 즐거운 착오를 경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조강석, 「이미지로부터 이미지 사이로 이미지를」, 『계간 시작 52호』, 2015) (강조 인용자)
혹은 위와 같은 배치를 통해 발생하는 ‘리듬’을 주축으로 한 조재룡의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시집 해설
8이제니의 시가 리듬의 화신인 것은 이렇듯, 시에서 모든 언어 요소들의 상호의존성을 전제하는 독서를 추동하기 때문이다. (...) 모든 낱말들이 제 기능을 이중삼중으로 한없이 늘려내, 다채로운 사용, 예기치 못한 활용을 보장받아, 함께 체계 속에서 구동될 때, 문법 너머의 세계, 그러니까 문법의 범주 안에 머물지 않는 어떤 언어의 상태가 고지되는 것이다. (조재룡, 「리듬의 프락시스, 목소리의 여행」, 2014) (강조 인용자)
을 살펴보아도 좋겠지만 양자 모두 시적 언술의 결과를 ‘어떤 추상’, ‘어떤 언어의 상태’라고 다소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언술을 통해 시의 무한성이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는지에 무게를 싣고 독해해 보고자 한다.
이쯤에서 니체의 영원회귀 이론을 경유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영원회귀 이론은 열역학 제1법칙, 즉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성립되었다. 다시 말해 시간은 무한한 데 비해 에너지는 제한되어 있기에 같은 조합이 무수히 반복될 것이라는 의미다. 이를 동일자의 반복으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차이의 반복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론으로 귀결될 것이다.
위 시는 명백한 반복의 형태를 띠고 있다. 문장 단위에서도 그러하며 시 전체 단위에서도 그렇다. 부연하자면 첫 연에서 “눈물” 다음에 온 “너울” 다음에 존재하는 것은 바로 “하늘”이다. 마지막 연에서 “너울” 너머로 지고 있는 것이 “노을”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노을”의 공간이 첫 연의 “하늘”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정합적이다. 이때 반복이 발생한다. 이는 “하늘”-“노을”의 수미상관 구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을”이라는, 시 전체에 소멸의 분위기를 드리우는 대상이 지닌 특수성에 기인하기도 한다. “노을”은 소멸의 시간을 상징하는 동시에 내가 있는 곳을 기준으로 태양이 지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우주적 현상의 표상이며, 이는 동시에 동일 궤도를 따라 다음 날 아침 다시 떠오를 태양의 모습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같은 소멸의 순간, 즉 하루라는 시간 단위가 영원히 반복적으로 죽었다 다시 태어나리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이러한 반복은 차라투스트라가 자연의 동물들을 마주하며 언급한 ‘후렴’ 9“오, 어릿광대들이여, 오, 손풍금들이여…… 너희들은 벌써 후렴을 만들었구나!” 여기서 후렴은 주기나 순환들에 해당하는 영원회귀, 유사-함과 동등-함으로서의 영원회귀이다. 요컨대 그것은 자연 발생적인 동물적 확실성에 해당하는 영원회귀이자 자연 자체의 감성적 법칙으로서의 영원회귀이다. (질 들뢰즈 저, 김상환 역 『차이와 반복』 37쪽, 민음사, 2004) 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이 반복은 차이의 반복이다. 해당 시에서 1회의 반복이 완료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2회 차 반복에서 앞서 언급한 이유로 “하늘”을 “노을”로 대체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2연의 “노을” 너머에는 “얼굴”이 오게 될 것이다. 이때 “얼굴”의 의미는 1회 차의 “하늘” 너머에 있던 “얼굴”과는 달라질 것이다. 즉 차이가 생성된다. 1회 차에 “하늘”이었던 “하늘”에 “노을”이라는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연의 “노을” 너머 “얼굴”은, 1회 차 반복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노을의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로 변화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영원회귀는 ‘같은 것’을 되돌아오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성하는 것에 대해 회귀가 그 유일한 같음을 구성하는 것이다. 회귀는 생성 자체의 동일하게-되기이며 따라서 회귀는 유일한 동일성이다. 10질 들뢰즈, 위의 책 112쪽. 위 시의 이러한 반복 속에서 바람, 마음, 노래, 호흡, 죽음, 구름, 저녁, 안개, 들판, 먼지, 거리, 정적, 언덕, 나무, 눈물, 너울과 노을까지, 그중 무엇도 그 이전의 반복 속에 등장하는 단어들과 동일자일 수 없으며, 그 모든 것이 반복된다는 사실만이 동일성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시는 무한한 차이를 생성하며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영원한 반복으로서의 무한일 것이다.
“중국 화엄종의 고승 법장은 이 세계를 측천무후에게 설명하기 위해 천장과 바닥과 벽 등 실내가 온통 거울로 된 집을 지은 후 그녀를 초대하였다. 실내에 들어서자 자신의 모습이 사방에 무한히 반사되는 것을 보고 측천무후는 매우 놀랐다고 한다. 이것은 전체와 부분이 즉합하는 것에 대한 공간적인 비유인데, 만일 시간적으로 표현하자면 과거, 미래의 모든 일이 현재라는 한순간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의상대사는 그의 화엄일승법계도에서 이것을 '일념즉시무량겁, 구세십세호상즉(一念卽是無量劫, 九世十世互相卽 과거 현재 미래가 찰나 속에 깃든다)'이라고 노래했다. 이 말은 과거의 모든 시간이 현재에 연결되고, 현재 또한 미래의 모든 시간과 연결된다는 연기사상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11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리시아 후라도 공저, 김홍근 역,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24쪽, 여시아문, 1998.
윌리엄 블레이크는 “시간은 영원의 선물이다”라고 했다. 만일 인간이 시간을 초월한 존재를 한 번에 다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에 압도당해 죽고 말 것이라는 의미다. 대신 영원은 관대하게도 인간들로 하여금 그 모든 경험을 하나씩 차례로 겪을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따라서 시간은 영원이 인간에게 선사한 선물이 된다. 위 일화에서 고승 법장이 측천무후에게 공간적 은유를 통해 설명한 과거, 현재, 미래의 연결 역시 그 모든 것을 순차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너무도 허술한 감각을 지닌 인간을 위한 영원의 소박한 재현이다.
블레이크의 말대로 인간이 지닌 감각의 한계가 실은 축복이라면, 한 순간의 어마어마한 고통을 생의 흐름에 따라 나누어 받게 되는 것이라면, 영원을 재현하려는, 즉 찰나에 깃든 과거, 현재, 미래를 포착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어떠한 초월에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시도는 끝내 실패할 것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초월적이다.
부른다. 목소리. 점자를 읽어 내려가는 소녀의 손가락. 소녀는 늙어가고 점자는 흐려진다. 손가락. 닳아가는 손가락. 손가락은 듣는다. 얼룩과 눈물. 숨결과 속삭임. 선과 선을 그리는. 원과 원을 따라가는. 간격과 간격 사이에서 흔적과 흔적 너머에서. 연기. 피어오르는. 희미한 몸짓. 들려온다. 목소리. 닳아가는 것. 너는 양의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고 이국의 거리를 걷고 있는 너를 본다. 공기. 푸르고 투명한. 아니다. 잿빛. 어둡고 투박한. 목소리. 흐른다. 시간이 세월이 되기 위해 흘렀던 눈물이 있었고. 음률. 느리고 낮은. 읊조리는. 목소리. 흐르면서 사라지는. 가슴을 치는. 목소리. 부른다. 이름을. 부른다. 목소리. 점자를 읽어 내려가는. 손가락. 모퉁이를 돌면 나타나는 그림자. 이국의 거리에는 이국의 얼룩이 맺혀 있고. 너는 영원을 보는 얼굴로 거리를 걷고 있는 너를 본다. 양의 가죽으로 만든. 구두는 닳아간다. 밤과 낮이 이어진다. 소녀와 노파가 스쳐 지나간다. 말과 말이 겹쳐 흐른다. 목소리. 들려온다. 푸른색이다. 다시 밝아지기 직전이다. 세계는 침묵 속에 잠겨 있다. 너는 성모 마리아상을 올려다본다. 얼굴은 희고 맑았다. 아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소리 없는 소리로 얼굴은 바닥을 내려다본다. 다다른 곳은 모퉁이의 어두움. 양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막다른 언덕이다. 부른다. 목소리. 점자를 읽어 내려가는 노파의 손가락. 읊조림. 느리고 낮은. 노파는 소녀의 목소리를 덧입고. 양의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덧신고. 이국의 거리를 걷고 있는 잔영이 있다. 과거를 일깨우며 스며드는 슬픔이 있다. 모퉁이를 돌면 사라지는 그림자. 벽과 벽 사이. 눈꺼풀과 눈꺼풀 사이. 막다른 음률. 흐르는 걸음. 닳아가는 것. 너는 영원을 보고 있고 나는 영원을 보는 너의 얼굴을 보고 있다. 시간과 시간이 겹으로 흐르고. 페이지를 넘기면 오래전 그어놓은 밑줄이 있다. 부른다. 목소리. 양의 가죽으로 만든. 이국의 구두 위에 내려앉은 이국의 구름. 탁자 위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오래된 기별이 놓여 있다. 아니다. 흐려지는 움직임. 목소리.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눈물은 막다른 곳으로 흐른다. 점자를 읽어 내려가는 손가락. 종이의 요철 위로 오래전 걸었던 이름 모를 광장이 나타나고. 푸른색. 다시 밝아지기 직전이다. 너는 새벽의 푸른빛에 얼굴을 씻고 있는 너를 본다. 죽음 이후의 눈꺼풀 속에는 흰빛이 있다. 비어 있는 공간으로 그림자가 나아간다. 떠나왔던 장소 위로 떠나왔던 얼굴이 겹쳐 흐른다. 사람이 아닌 얼굴이었다. 세상이 아닌 그늘이었다. 아름답고 가득했다. 환하고 어두웠다. 잊었던 빛이 되돌아오고. 네 속으로부터 솟아나는 목소리. 몸으로부터 떠나온. 소녀와 노파는 양의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고. 영원을 보는 얼굴로 거리를 걷는다. 부른다. 목소리. 되돌아오는 목소리. 잊히지 않는 음운으로 도착하는. 목소리. 감은 눈 속에서 번지며 들려오는 목소리. 가장 나중의 목소리.
― 「가장 나중의 목소리」 12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108쪽, 문학과지성사, 2019. 전문
이제니의 시가 다성(多聲)적 13이제니의 세 번째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은 ‘다성(多聲)’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조재룡, 「목소리의 탄생」, 위의 책 169쪽)이며 소리에 민감하다는 사실은 그리 새로운 발견은 아니다. 의미보다 앞서 발생하는 언어의 음성적 측면에 몰두하여 나아가는 다수의 시편들과 「발화 연습 문장」 연작은 물론 위 시의 제목이 ‘가장 나중의 목소리’이기도 하거니와, 같은 시집의 다른 시에서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으로 흐르고 있었다” 14이제니, 「빗나가고 빗나가는 빛나는 삶」, 위의 책 20쪽. 라는 양자역학의 너무도 유명한 명제를 굳이 언급한 이유 역시 이 때문일 것이다. 목소리는 파동이다. 이제니의 시에서 위 문장은 “빛은 입자인 동시에 목소리로 흐르고 있었다”고 변환되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제니의 시는 흐르는 목소리들이 빛, 즉 풍경이 되는 장소이며 이곳에서 시간은 목소리들의 얽힘으로 드러난다.
서양 전통 음악에서 목소리와 목소리들의 얽힘은 모노포니(monophony), 폴리포니(polyphony), 호모포니(homophony), 헤테로포니(heterophony) 등의 상태로 설명되어 왔다. 하나의 목소리가 있거나(모노포니), 여러 목소리가 제 속도로 스쳐 지나가면서 만나거나(폴리포니),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울리거나(호모포니), 여러 목소리가 중심 없는 상태로 유연하게 움직이거나(헤테로포니). 15조선령, 남수영, 신예슬, 오민, 최창현, 박수지, 『토마』 64쪽, 작업실유령, 2021. ‘다성’이란 본래 폴리포니를 의미하지만 그보다 하나의 선율과 그것을 변형한 선율이 동시에 존재하는 헤테로포니가 위 시의 다성성이 재현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그것이 깃들어 있는 찰나들의 연속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시에 제시된 각각의 시간적 연속체를 하나의 음악 속 하나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면, 여러 목소리가 하나의 선율을 노래하는 한 곡의 음악을 감상하듯 여러 층위로 흘러가는 시를 보다 구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에서 각각의 목소리는 어떻게 펼쳐지고 중첩되며 소멸하는가. 이 목소리들은 어떠한 시공간의 물길 위로 흘러가는가.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어떻게 ‘가장 마지막 목소리’로 합일되는가. 여러 목소리들이 섞여 있는 듯 보이는 위 시의 언술 방식은 얼핏 자유간접화법의 일환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인물과 서술자의 분리를 전제로 하되 그 경계를 무화하는 방식으로 혼동을 유발하는 자유간접화법과 달리, 위 시에서 객관적 서술자는 한 명이 아니거나 식별 불가능하며 다만 “소녀”라는 하나의 인물이 다층적인 시공간에서 산발적으로 등장하고, 인물에게 전해지는 목소리와 인물이 발화하는 목소리가 혼재되는 등 그 양상을 달리한다. 어쩌면 군단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이러한 목소리들의 공존은 시의 시간이 비선형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며, 이러한 비선형적 시간은 점자를 매개로 하여 “소녀-노파-죽음 이후의 소녀”의 시간을 넘나드는 목소리의 얽힘으로 출현한다.
위 시가 헤테로포니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전제하에 시의 주선율, 즉 본래의 선율은 ‘점자를 읽는 소녀’라는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은 모두 ‘점자를 읽는 소녀’로부터 파생된 변주들이다. 시에서는 각각의 트랙 위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가 펼쳐지는데, 이때 트랙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⓵ 소녀의 현재
⓶ 소녀의 미래
⓷ 점자의 내부
⓸ 점자의 외부
해당 트랙들은 서로 중첩되는 모습을 보인다. 우선 중점적인 트랙을 기준으로 살펴보자면 도입부의 “부른다. 목소리. 점자를 읽어 내려가는 소녀의 손가락. 소녀는 늙어가고 점자는 흐려진다. 손가락. 닳아가는 손가락. 손가락은 듣는다. 얼룩과 눈물. 숨결과 속삭임. 선과 선을 그리는. 원과 원을 따라가는. 간격과 간격 사이에서. 흔적과 흔적 너머에서. 연기. 피어오르는. 희미한 몸짓. 들려온다. 목소리. 닳아가는 것.” 부분은 소녀의 현재 모습을 묘사하는 ⓵트랙의 목소리이다. 다만 이 현재는 미래로 이동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소녀는 늙어가고 점자는 흐려진다”)
다음 문장 “너는 양의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고 이국의 거리를 걷고 있는 너를 본다”에서는 다성적 목소리가 새롭게 출현한다. 앞의 도입부 문장에서 주체인 “나”와 대상인 “너”가 등장한 적이 없고 다만 점자를 읽는 “소녀”의 모습이 묘사되었을 뿐이기에 이 문장에 이르러 갑자기 “나”와 “너”가 등장하는 것이 다성적 시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조금 당황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이를 ⓷트랙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면, 위 문장은 점자책 내부의 문장이며, 이를 손끝으로 따라 읽고 있는 “소녀”를 향한 일종의 전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양의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고 이국의 거리를 걷고 있는 너”는 “소녀”의 감은 눈 속에서 상영되는 “소녀”의 모습으로 화한다.
⓶트랙에서 발생하는 목소리가 지시하는 “노파”의 존재에 좀 더 주목해 보자. “노파”는 “소녀”에게 발생하는 시간의 흐름의 결과다. 시의 전반부 “소녀는 늙어가고 점자는 흐려진다.”, “닳아가는 손가락” 등을 통해 “노파”의 발생은 예고되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후 “소녀와 노파가 스쳐 지나간다.”라는 진술을 통해 “소녀”와 “노파”가 건널 수 없는 시간의 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닌, 한 순간에 공존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암시는 ⓵트랙과 ⓶트랙에서 발생하는 목소리의 중첩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바로 뒤이어 “말과 말이 겹쳐 흐른다.”라는 문장이 덧붙여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성모 마리아상”이라는 종교적 상징물의 등장 역시 마찬가지로 필연적이다. “얼굴은 희고 맑았다. 아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라는 진술을 통해 성모 마리아상의 초월성이 강조되는데, 이는 시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소녀”, “노파”의 존재와 대비를 이룬다.
분리되어 있던 “소녀”와 “노파”는 점자책의 진행에 따라,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파는 소녀의 목소리를 덧입고. 양의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덧신”는 방식으로 합일한다. “이국의 거리를 걷고 있는 잔영”, “과거를 일깨우며 스며드는 슬픔”은 모두 “소녀”였던 자신을 기억하는 “노파”의 회상의 목소리이다. 즉 ⓶트랙의 목소리를 통해 ⓵트랙의 목소리를 회상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소녀”의 형체가 흐려지고 “노파”의 형체가 강화되는 방식의 합일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너는 영원을 보고 있고 나는 영원을 보고 있는 너의 얼굴을 보고 있다”는 발화에 이르러서는 ⓵⓶⓷⓸트랙이 모두 중첩된다. 이는 점자책의 목소리를 빌어 노파가 소녀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영원을 보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노파’가 발화하는, 영원을 보고 있는 자신의 과거를 향한 미래 자신의 목소리다. 이 한 문장에 이토록 복잡한 시간성이 내포되어 있기에 바로 뒤이어 “시간과 시간이 겹으로 흐르고.”라는 문장이 등장하는 것이다.
위 시에서 “노파”는 “소녀”의 유일한 미래가 아니다. 시간은 “노파”의 존재를 관통하여 죽음에 이른다. “죽음 이후의 눈꺼풀 속에는 흰빛이 있다.”는 문장은 전술했던 성모 마리아상의 “희고 맑은 얼굴”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닌 얼굴이었다. 세상이 아닌 그늘이었다. 아름답고 가득했다. 환하고 어두웠다.”라는 묘사가 죽음 이후를 말하는 것임은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죽음 이후의 시간만이 초월적 대상인 성모마리아상과 유사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잊었던 빛이 되돌아오고. 네 속으로부터 솟아나는. 목소리. 몸으로부터 떠나온.”이라는 그다음 문장을 통해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도약이 발생한다. 반복해 말했다시피 이 시에서 시간은 비선형적이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죽음은 삶과 공존하는 하나의 상태일 뿐이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생사의 순환이 발생하며, 이러한 순환 역시 “네 속으로부터 솟아나는” 목소리의 발생에 근거한다.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목소리로써 연결되어 있고 공존하기에, 소녀가 노파가 되고 죽음을 맞이함과 동시에 “소녀와 노파는 양의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고. 영원을 보는 얼굴로 거리를 걷는다.”는 진술 역시 가능해지는 것이다. 즉 “소녀”와 “노파”는 함께 “영원을 보는 얼굴로 거리를 걷”고, 함께 자신의 목소리를 부르고, 목소리는 부름대로 되돌아오며, “잊히지 않는 음운”으로 도착한다. 이 목소리는 “감은 눈 속에서 번지며 들려오는” “가장 나중의 목소리”이다. 이때 시는 소녀가 점자를 읽는 시의 첫 순간으로, 즉 소녀의 “감은 눈 속”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소녀의 생애는 다시 반복된다. 이 한 편의 시 안에서 소녀의 일생이, 소녀의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반복되며 순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장 나중의 목소리」의 비선형적 시간은 각각 ‘점자를 읽는 소녀’라는 존재의 변주로서 하나의 시 안에서 흘러가며 서로 중첩되는 헤테로포니의 상태를 구성한다. 누군가는 시의 내부에서 시공간의 트랙이 분리되어 있는데 어떻게 이러한 중첩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일본의 물리학자 군지 페기오-유키오(郡司ペギオ幸夫)의 말을 빌리자면 기지(旣知)와 미지(未知)의 구별이 있기 때문에 아직 체험되지 않은 미래와 이미 체험된 과거는 구별되고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고 느낀다. 16군지 페기오-유키오, 『시간의 정체 – 데자뷔 인과론 양자론』 5쪽, 그린비, 2019. 그 둘이 혼동될 때 시간은 성립하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지와 미지는 양립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데자뷔(déjà vu)나 자메뷔(jamais vu)를 체험한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한편으로는 기지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지인 체험의 존재를 의미한다. 이제니의 시에서 발견되는, 다성의 목소리가 시공간의 중첩을 만들어내는 순간은 일종의 데자뷔와 자메뷔의 체험을 유도하며, 이로 인한 감각의 착란을 통해 독자의 인식 속에 비선형적 시간의 형태를 부조한다. 이러한 시간의 형태가 영원성을 담지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무한부터 영원까지,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감각되는 이러한 주제 의식이 어째서 이제니의 시에는 이토록 깊고 치열하게 녹아들 수 있었던 것일까. 시인의 삶과 맞닿아 있는 그 해답의 일부를 이제니의 같은 인터뷰 속 다른 대답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창문을 열면 바다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집에서 살았어요. 집에서 어른 걸음으로 서너 걸음만 걸으면 바다로 바로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바다가 가까이에 있었어요. 일 년 삼백육십오일 내내, 물결이 오고 가고, 배가 오고 가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또 태풍이 몰아닥쳐서 파도가 사납게 일기도 하고, 그러다 또 어느 결에 잔잔해지고. 그렇게 반복적으로 밀려오는 물결과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을 매일매일 바라보면서, 무한에 대한 감각이랄까, 무한의 무게와 똑같은 소멸의 이미지라고 할까, 그런 감각이 저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거겠죠.”
-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66쪽, 문학과지성사, 2014.
- 앙리 베르그손 저, 박종원 역, 『물질과 기억』, 아카넷, 2005.
- non-lieu. 원래는 법률 용어로서 ‘기소 면제’를 뜻한다. 그러나 푸코는 언어의 공간이 현실의 공간에 직접 연루되지 않는다는 뜻을 함축하여 사용한다. 이를테면 ‘장소 아닌 장소’다. (...) 언어는 사유의 분석, 즉 단순한 마름질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공간에 질서를 정립하는 활동이다. (미셸 푸코 저, 이규현 역 『말과 사물』 10쪽, 민음사, 2012. 옮긴이 주 참조.)
- 이제니, 앞의 책 45쪽.
- 이제니 시인 인터뷰 X 원모어백, 매거진 더콤마에이, 2015.
- “시라는 것이 ‘말과의 자유로운 놀음’이라는 소박한 진실을 이렇게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강동호, 「고통의 축제 – 전망도 회고도 아닌 삶」, 『문학과사회 95호』, 2011)
“이러한 고독한 여정은 재치 있는 말놀이의 과정과 함께 한다. ‘나는 정말 요롱이가 되고 싶어요. 요롱요롱한 어투로 요롱요롱하게’(「요롱이는 말 한다」), ‘완두는 싫다 싫어요/ 완두는 완두 완두 하고 울기 때문에// 당신은 완고하다/ 당신은 완고한 완두콩’(「완고한 완두콩」)과 같은 구절들은 통통 튀는 리듬감을 선사하기도 한다.”(이송희, 「유쾌한 말놀이의 방식」, 『열린시학』, 2011)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2010)에서는 노스탤지어의 감정이 강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때도 기표와 기의를 분리시키는 고유한 말놀이의 재기발랄함이 많이 언급됐지만, 기본적으로는 ‘페루’처럼 실제의 고향은 아니지만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먼 기원에의 갈망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에요.”(강지희, 「문학 초점 -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창작과비평 167호』, 2015)
“요컨대 이제니 시세계에서 주체의 억압된 무의식은 의미 없는 기표들의 놀이 혹은 무의미한 나선형의 파동으로 집중 발현된다.”(이진경, 「나선의 숲에서 부유하는 시어들」, 2018) , “너울”과 “노을”의 병치를 통해 발생하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상호작용은 전술한 바와 같이 그 층위가 단순하지 않으며 서로 교환되고 혼재되는 양상을 보인다. - 이 시는 공간을 묘사하고 시간을 극화하는 태연함 속에서 감각의 착란 혹은 착오를 일으킴으로써 리얼리티를 강화하는 묘한 효과를 발휘하는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쉽게 말하자면 “너머”라는 말이 환기하는 공간감과 “다음”이라는 말이 환기하는 시간 의식이 효과적으로 공존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시의 입체감을 부각시키는 것은 또 있다. “있다”라는 말이 환기하는 존재감과 “온다”라는 말이 환기하는 사건의 현장감이 공존하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떤 추상을 보게 하고 오히려 구체적인 것을 배경으로 돌리게 하는 즐거운 착오를 경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조강석, 「이미지로부터 이미지 사이로 이미지를」, 『계간 시작 52호』, 2015) (강조 인용자)
- 이제니의 시가 리듬의 화신인 것은 이렇듯, 시에서 모든 언어 요소들의 상호의존성을 전제하는 독서를 추동하기 때문이다. (...) 모든 낱말들이 제 기능을 이중삼중으로 한없이 늘려내, 다채로운 사용, 예기치 못한 활용을 보장받아, 함께 체계 속에서 구동될 때, 문법 너머의 세계, 그러니까 문법의 범주 안에 머물지 않는 어떤 언어의 상태가 고지되는 것이다. (조재룡, 「리듬의 프락시스, 목소리의 여행」, 2014) (강조 인용자)
- “오, 어릿광대들이여, 오, 손풍금들이여…… 너희들은 벌써 후렴을 만들었구나!” 여기서 후렴은 주기나 순환들에 해당하는 영원회귀, 유사-함과 동등-함으로서의 영원회귀이다. 요컨대 그것은 자연 발생적인 동물적 확실성에 해당하는 영원회귀이자 자연 자체의 감성적 법칙으로서의 영원회귀이다. (질 들뢰즈 저, 김상환 역 『차이와 반복』 37쪽, 민음사, 2004)
- 질 들뢰즈, 위의 책 112쪽.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리시아 후라도 공저, 김홍근 역,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24쪽, 여시아문, 1998.
-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108쪽, 문학과지성사, 2019.
- 이제니의 세 번째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은 ‘다성(多聲)’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조재룡, 「목소리의 탄생」, 위의 책 169쪽)
- 이제니, 「빗나가고 빗나가는 빛나는 삶」, 위의 책 20쪽.
- 조선령, 남수영, 신예슬, 오민, 최창현, 박수지, 『토마』 64쪽, 작업실유령, 2021.
- 군지 페기오-유키오, 『시간의 정체 – 데자뷔 인과론 양자론』 5쪽, 그린비,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