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동물
저, 혹시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아, 여기 사는 분이 아니시구나. 물소리를 쭉 따라가다 보면 역이 나올 거예요. 아무렴 여긴 이 시간에 오면 나가는 길은 고사하고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도 헷갈린다니까요. 소리만 선명하게 우글거리죠. 세상의 끝을 생각하면 흔히 암흑을 떠올리곤 하겠지만 실은 흼에 가깝지요. 어둠은 무에 근접할 수는 있지만 무를 뜻할 수는 없거든요.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별안간 모자를 털어 나를 놀라게 했다. 모자에서 떨어진 깃털 몇 개가 밤하늘을 천천히 날아오르고 가라앉으며 어둠의 텅 빔을 훼방 놓았다.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모든 말들은 외국어였고 나는 모르는 말을 가진 것들을 하나씩 보여주려 애쓰고 있었다. 사물과 사물의 배치, 배치된 사물들 사이의 간격, 그 안에 고이는 여러 숨 같은 것. 결코 직선을 그리는 법 없이 움직이며 우리 사이의 텅 빔을 훼방 놓는 말.
그는 사시사철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다니면서 호숫가를 걷는 사람들에게 불을 빌리고, 빌린 불을 천천히 태우며 새 이야기를 들려줬다. 백조의 초기 깃털은 체온 유지와 장식이 주된 기능이었지요. 이 모자와 별반 다르지 않게요. 펄럭이는 흰 깃털 사이로 삐져나온 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천천히 나부꼈다. 이 깃털이 날 수 있는 구조가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입니다. 완전히 자란 깃털은 사실상 죽은 상태라 한 번 손상되면 복구되지 않지요. 이 깃털—죽음을 관리하는 것은 생존에 무척 중요한 일이고, 그것이 바로 이렇게 사방에 깃털이 흩어져 있는 이유입니다. 아이고, 그렇게 죽은 새 더미라도 본 것처럼 겁먹은 얼굴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네, 네, 물론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피부, 깃털, 머리카락, 털 뭉치, 비늘 같은 것들은 아주 약간만으로도 어쩔 수 없이 사람이나 새, 개, 곰, 물고기…… 이런 것들을 떠올리게 하고 말지요. 일단 떠오른 것은 점점 형상에 세부를 더하며 당신 머릿속에 들러붙고요. 떨치려 애쓸수록 그것의 눈동자 색깔, 눈동자를 감싼 속눈썹이나 엉겨 붙은 눈곱, 무엇보다 그 모든 것에 둘러싸인 응시와 깊이 얽히게 되지요.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거기까지 듣고 나는 그의 모자를 여러 번 핥아주었다.
이야기를 마친 그는 빌려 갔던 불을 새 모자에 담아 돌려주었다. 어렵게 피운 것이니 조심해서 들고 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당부하면서. 불이 덮어쓴 모자의 깃털들은 사방을 아늑한 분위기로 채우며 아름답게 일렁였다. 그것과 함께 물소리를 따라 역까지 걷는 길에는 아주 귀한 것을 다루듯이 또한 귀여워하듯이 어깨와 목이 바짝 긴장되었다. 그가 내게 이걸 가지라고, 이 불과 모자를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여기며 친근하게 굴라 일렀으나 나는 그것을 자꾸 추운 날 지나치는 남의 집 창문처럼 보게 되었다. 따뜻한 너머라는 인상만을 가진 것. 그러면서도 그것이 예쁘고 귀여워 죽겠다는 기분이 든다는 것, 또 이런 것을 들고 있으니 땅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아 깨금발을 들게 된다는 것. 땅의 연약성을 훼손하는 나의 발을 견딜 수가 없다는 것. 견딜 수 없음을 어쩔 수 없다는 것…… 작은 불이 담긴 모자를 안아 본다.
불을 갚은 그는 모자를 뒤집으면 집이 시작된다, 그리고 집이 시작되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무서운…… 중얼거리며 가던 길을 갔다. 그 사람은 아무리 날뛰는 야생이 사방에 있더라도 사시사철 흰 깃털로 만든 모자를 벗는 법이 없었다. 나는 본 적도 없으면서 모자 안에 든 그것이 얼굴이라고 확신한다. 약간의 깃털만으로도 그를 떠올리는 일을 피할 수가 없다. 집은 언제나 이런 일을 만들고 만다. 저,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묻는 외국인에게 친절하게 웃으며 불을 빌려주었을 뿐인데. 집이 시작되는 것은, 집이…… 중얼거리며 떨리는 그이의 입술에서 피어오른 담배 연기 휘청이며 어둠을 어지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