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뒤집으면 시작되는⟫ 작업 노트

⟪모자를 뒤집으면 시작되는⟫은 인식과 감각의 틈새, 현실과 허구의 경계, 말과 물질이 서로 착오를 일으키는 자리에서 발생하는 서사를 탐색한다. 이 시 연작에서 ‘모자’는 단순한 의복이나 머리를 덮는 사물이 아니라 공간의 역치이자 감각의 틈으로 작동하는 기호이며, ‘집’과 ‘몸’의 전이이자, 내면과 외면의 구별을 교란시키는 다공성의 구조다.

“모자를 뒤집으면 시작되는 집”이라는 반복적 이미지에서 보이듯, 집은 닫힌 보호의 공간이라기보다 언제든 내밀함이 외부로 흘러나갈 수 있는 연약한 내부에 가깝다. 또한 ‘집’은 돌아가는 곳이기보다, 돌아가려는 움직임에서만 발생하는 사건, 부드럽고 흐릿한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예외적인 내부다. ‘집’이라는 장소가 지닌 안정성의 환상은 모자의 얇고 성글게 짜인 구조 속에서 언제든 해체될 수 있다. 이 집은 정주의 장소가 아니라 이동과 착각, 오차와 뒤섞임 속에서만 간헐적으로 경험되는 환상으로 존재한다.

‘모자’는 기억과 감각, 언어와 세계 사이의 얇은 막이며, 그것을 뒤집는 행위는 늘 새로운 ‘집’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착각의 장치로 기능한다. ⟪모자를 뒤집으면 시작되는⟫은 시적 이미지가 어떻게 물성과 착각, 인식의 간극을 통해 구조화되는지를 관찰하는 과정이며, 여기서 ‘모자’는 모든 간극을 통과하고 환기하는 하나의 장치로서, 집과 몸, 말과 리듬 사이의 관계를 다시 쓰는 실천으로 작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