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의 안쪽으로 멀리

시인 이수명은 “시를 쓰는 일은 완벽한 휴식이다”라고 했습니다. ¹이수명 『횡단』, 민음사, 2019 휴식, 그러니까 ‘쉼’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몸을 어디에, 어떤 상태로 놓아둘 것인지, 무엇을 하고 누구와 있는지, 어떤 자세로 있는지는 쉼을 작동시키는 기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몸과 정신, 그리고 시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조정 없이 쉼은 불가능합니다. 쉼은 우리가 기존의 시간성으로부터 잠시 탈구된 곳에 머무르는 상태입니다. 우리의 몸과 정신에 겹겹이 쌓여 있는 과거, 우리의 몸과 정신에 밀려오는 미래로부터 이탈한 움푹한 장소에 우리를 놓아두는 것입니다. 매 순간, 그리고 끝없이 사라지는 중인 현재라는 시간만이 작동하는 장소에 있는 것이지요. 시간 안에서 우리는 물결 위의 부표처럼 끝없이 출렁이는 땅 위에 있습니다. 도래하는 과거에 파묻히고, 떠다니는 미래의 조각을 붙잡으려 손을 허우적대기를 멈출 수 없지요. 우리를 덮치는 물결도, 물결 위를 떠다니는 미래의 징후들, 파편들도 모두 지나친 현실로 감각됩니다. 지나치게 생생한 현실이란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그러나 쉼의 상태에 있을 때,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은 잠시 현실성을 잃습니다. 우리의 현재에 개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끝없이 소멸하는 현재 속에, 아무런 징후 없는 현재 속에 있습니다. 쉼은 시간성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있다는 감각, 그런 환상, 시간의 더께로부터도 시간의 흉포한 운동으로부터도 안전한 곳에 있다는 감각입니다. 물리적으로 나의 몸이 속한 장소를 이탈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쉼을 위해 하는 행동들—비행기를 타고 낯선 장소에 가기, 누워 있기, 호텔 예약하기 같은—은 이러한 상태를 위한 장치인 것이겠지요. 그러나 ‘완벽한 휴식’은 기존의 시간성 안에서, 우리의 물리적인 몸이 처한 상태를 변경하는 것만으로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완벽한 휴식은 나로부터, 내가 속한 현재로부터, 나의 인식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어디서 멀어진 것인지, 멀어져 온 장소조차 잊는 것입니다.

그러나 멀어져 온 장소를 완전히 망각하게 되는 것, 내가 속한 현재를 완전히 유리시킨 아름다운 장소에 있다는 감각은 휴식이 될 수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감각, 이러한 휴식에 대한 열망은 우리에게 영원한 쉼 없음의 피로를 유발할 뿐입니다. 멀리 이동하는 일이 멀리 나아가는 것과 혼동될 때, 멀어지기는 쉼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가 작은 점들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쉼을 위해서는 한 점에서 아주 멀리 있는 다른 점으로 건너가거나, 점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속한 현재에서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점의 내부를 향해 깊숙이 뛰어내리는 방식으로 멀어질 때, 점의 내부는 무한해지지요. 우리는 수직과 수평이 아닌 다른 방향의 운동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문학적 상태는 이런 멀어지기—나아가기를 가능하게 합니다. 흩어진 현재, 아주 작은 조각으로 분화되어 모든 곳에 존재하는 일시성 속에 깊이 머무는 일. 읽고 쓰는 몸을 가진 자로서 마주할 완전한 몰입의 순간에 가능한, 문학적 상태입니다. 가볍게 떠오르는 떠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겁게 가라앉으며 깊숙한 미지로, 무한으로, 우리가 속한 현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나아가는 떠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문학적 쉼의 상태입니다.

데리다는 이음매에서 빠진 시간이란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온 시간, 제 경첩에서 빠진 시간, 자신의 장소 안으로, 자신의 현재 안으로 모아들여지지 않는 시간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²자크 데리다, 마우리치오 페라리스 『비밀의 취향』, 김민호 옮김, 이학사, 2022 압도적인 척력으로 우리의 정신을 끌어당기는 사건들은 이음매에서 시간을 빼냅니다. 탈구된 장소로서의 시간을 만들지요. 사건이 휘두르는 척력은 우리의 삶 자체를 부서뜨릴 수 있는, 흉포한 위험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문학이 될 때, 우리는 부드러운 위험 속에 놓입니다. 이 위험은 우리를 부드럽게 헝클어놓고 우리의 일부분을 허물며 수선할 자리를 만듭니다. 또는 우리가 쉼을 필요로 하게 되는 어떤 사건, 또는 사실이 있다고 상정해 봅시다. 우리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사건이나 사실을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과 나의 관계는 변경할 수 있지요. 관계에 따라 현재는 다시 배열됩니다. 시간의 도랑에서 부유하기를 잠시 멈췄을 때, 도랑 곁의 움푹한 자리에 떨어졌을 때, 부드러운 충격과 함께 잡음이 사라지는 것. 내가 흐릿해지는 것. 우리를 감싸는 공간이 내는 자그마한 소음들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 이러한 쉼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새로운 몸으로 재편된 시간성 속을 떠다닐 것입니다. 문학적 상태는 시간의 구조를 변경합니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말에 따르면 ‘시간의 구조를 변경한다’는 것은 시간의 지연, 즉 모든 물체가 자기 주위의 시간을 더디게 만드는 것입니다. ³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중원 옮김, 쌤앤파커스, 2019 문학적 상태는 자기 안팎의, 그러니까 문학이라는 표피를 두른 우리의 시간을 더디게 만듭니다. 읽고 쓰는 우리의 몸은 미지를 서성이고, 추상성을 더듬고, 얼룩덜룩함을 닦아내고, 깊은 어둠 속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몸으로 존재하는 것 이상의 완벽한 휴식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시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시가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지시하는 것이 시에게 부당한 일이라는 것 정도를 알 것 같습니다. 다만 요즘은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경험하는 세계, 대상과 언어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정렬하고 둘이 함께 노출되는 순간 서로에게서 달아나 버리는 기록을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언어가 내재한 시간을 휘젓고, 헝클어뜨리고, 방향을 바꾸고, 언어 안에 켜켜이 쌓인 의미와 언어가 지시하려는 것들을 불러 모으고, 도망가게 하고, 씻기는 일인 것 같다고요. 언어가 품고 있는 시간은 낯선 공간으로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시의 언어는 무엇도 영구적으로 잡아채어 고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시의 언어는 사방에서 자신을 잡아채려는 시간으로부터 해방된 언어입니다. 모든 것이 일시성 안에서만 존재하는 공간. 어쩌면 우리가 완벽한 여행에서 기대하는 것 역시 이런 공간이겠지요. 우리의 보기가 닿는 순간마다 날아가고 있는 풍경들, 모든 것에 깃든 일시성. 이 안에서만 우리는 정말로 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책에 관한 카프카의 유명한 문장, “책은 우리 안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위한 도끼여야 한다”가 있지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얼어붙은 바다건, 뜨거운 아스팔트건, 백사장이건, 출렁이는 물결이건 우리의 쉼을 위해서는 우리가 속한 표면에 균열을 만들 도구가 필요합니다. 균열은 틈새를, 틈 안의 공간을, 틈 안의 공간에서만 가능한 쉼을, 그러니까 멀어지며 나아갈 방향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찢어진 현재의 틈새에 누워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을 것입니다. 그 풍경 안에서만 우리는 쉴 수 있습니다. 틈새는 어느새 우리의 세계를 무한하게 할 부드럽고, 두렵고, 아름다운 미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산뜻한 두려움과 함께 무한한 미지 속에 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