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성
시에 내가 꾼 꿈을 동원하는 일 앞에서 언제나 주저하게 되곤 했다. 꿈을 동원할 경우 시가 꿈에 잡아먹히는 동시에 꿈의 외피를 덧입음으로써 손쉽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떤 형상을 획득하게 되기 마련이고, 그것이 어쩐지 비겁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현실의 내부에서 시를 쓰고 있는 나의 몸을 꿈에게 내어주는 일이 불가해한 교환으로 느껴져서 두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꿈이 알 수 없고 위험한 자연, 아주 긴 막대기를 넣어도 바닥에 닿지 않을 만큼 깊고 깊은 작은 점, 새카만 미지를 내포한 현실의 한 귀퉁이, 현실 전체의 투명도를 변경하는 얇고 커다란 막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시와 꿈이 언제든 서로의 테두리를 넘치기 쉬운 상태로 찰랑이는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꿈은 현실을 이루는 얼룩 중 하나이며 현실 역시 꿈을 이루는 얼룩 중 하나인 것 같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시에 꿈을 동원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꿈에 시를 동원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제목에 감정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세 편의 시는 꿈을 위해, 꿈 때문에, 꿈에, 꿈으로 말미암아 시가 동원된 세 개의 사례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사정으로 인해 낯선 곳에서 조금 일찍 맞게 된 2024년 여름, 어느 날 밤의 꿈에서 나의 개는 기억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기억이 곧 개의 살점, 피, 뼈, 피부인 것처럼, 기억이 개를 이루는 질량이었던 것처럼, 기억만이 개라는 형상을 빚은 재료였던 것처럼 개는 작아지고 있었다. 평소처럼 개와 산책을 가려 했다. 그러나 가슴줄을 채우는 동안에도 개는 계속 작아지고 있었다. 가슴줄 너비를 줄이고, 줄이고, 더 줄여 보았지만 끈 길이를 조정하는 동안에도 개는 계속 작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헛일이었다. 나의 의지와도, 개의 의지와도 관계없이 개는 끝없이 줄을 빠져나갔다. 자기 이름을 잊고 산책이라는 소리를 잊고 걷는 방법을 잊었다. 개는 설명할 수 없이 이상한 보법으로 걸었다. 걷는 방법을 잊었으나 걷는 능력을 잃어버리지는 않은 몸의 걷기. 그 걸음이 나를 너무나 슬프게 했다. 이 슬픔에 대한 발화로서의 ‘슬픔’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얇고 좁았고, 그 사실이 나를 막막하고 두렵게 했다. 있는 힘껏 붙잡아 보아도 개는 나의 움직임보다 빠르게 작아지고 있었다. 테니스공 정도의 크기로 작아진 몸의 낯선 부피, 소멸을 향해 이동하는 중인 것처럼 계속 작아지는 몸의 낯선 움직임. 그러나 손에 닿는 몸이 지닌 촉감만은 꿈 바깥에서 가져온 기억과 완벽하게 같은 것이라 이상했다. 개가 나의 손에 전달하는 미미한 촉감은 평소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 부드러움이 손끝에서 작아지고 있는 개가 더 빠르게 손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붙잡고, 더 붙잡고, 계속 붙잡는 동안에도 개는 계속 작아졌다. 나는 아주 깊이 슬펐다. 그것은 내가 다룰 수 없는 깊이의 슬픔이었다. 어쩌면 그것을 시가 다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나에게서 빼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존재는 이야기의 표면에 잠시 맺혔다 흘러가는 물방울 같은 것에 불과해질 거라고, 이런 흘러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강변에 앉아 이야기하는 동안 수면에서 잠시 일렁이는 얼굴처럼. 얼굴 없이도 강이 여전히 강인 것처럼. 강이 얼굴을 다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꿈에서 나는 작아지는 몸 때문에 자꾸 손에서 벗어나는 개를 붙잡으려 애쓰며 뒷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얼굴을 보지 못해 다행이였다. 개가 촉감을 동반한 윤곽으로만 남아 있어서. 얼굴과 마주보지 않은 감정은 현실의 그림자만을 동원할 뿐이라서 빛이나 다른 개체의 개입 같은 외부의 조건에 의해 흐릿해질 수 있다. 다른 차원의 현실이나 시간과 뒤섞여버림으로써 내가 파악할 수 없는 저 너머의 시간까지 흘러 넘칠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진다. 언제부턴가 감정만이 생생한 현실 같다는, 실재하는 것 같다는, 유일한 사실이며 진실이라는 생각을 한다. 감정은 현실을 동원한다. 현실은 감정을 위해 동원된다. 가상의 개 하나가 있고 그걸 정말 사랑하게 되어버린 누군가가 있다면. 개가 아니라 인간이거나, 개미이거나, 코끼리라도 상관없다. 어쨌거나 어떤 개가 있고 내가 그 개를 사랑한다면, 개가 허구일지라도 사랑은 너무나 생생한 현실로 실재한다. 현실은 사랑을 위하여 개를 동원할 것이다. 고구마와 육포 중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을 보면 뛰어드는지 도망가는지, 차를 잘 타는지, 길고 흰 털을 가졌는지 짧고 빛나는 검은 털을 가졌는지, 무슨 색 눈동자를 가졌는지, 어떤 식으로 걷고 얼마나 자주 냄새를 맡느라 멈추는지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개를. 이때의 사랑은 물질과 존재를 동원하며, 사랑이 동원하는 존재는 기억을 동원한다. 물론 기억은 시간을 동원한다. 허구를 향한 사랑이 현실을, 존재를, 기억을, 시간을 동원한다면 이 모든 것이 동원된 무엇을 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공포나 슬픔 같은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나를 놀라게 한 것이 자라가 아니라 솥뚜껑이었음을 알게 된다고 해도, 자라라고 착각한 순간의 놀란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순간 속에 여전히 맺혀 있다. 그런 순간들, 생생한 현실들, 세계와 나 사이의 오해나 착각 진위와는 무관하게 여전히, 너무나 진짜인 감정들은 그 자리에 남아 시간을 감당한다. 이런 것들로 얼굴은 얼룩덜룩하다. 얼굴은 감정과 시간이 뒤엉킨 얼룩덜룩하고 구체적인 덩어리다. 마주 보는 얼굴은 나와 동시적인 시간에 존재하는 물질인 동시에 과거와 엉켜 있으며 미래를 품고 있어 지나간 시간도, 도래할 시간도 현재에 엮인 채로 함께 움직이며 보이는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말. 이야기. 문자. 언어. 언어는 참 이상하고 복잡한…… 무엇이다. 복잡한 다음에 오는 낱말로 기호, 비물질, 공간, 매체 같은 것들을 두고 고민하다 무엇도 정확하지 않은 것 같아 ‘무엇’이라는 단어로 일단 도망쳐 본다. 언어는 기호이고 비물질이고 공간이고 매체이며 소리, 이미지, 조형, 의미, 도구, 재현, 기타 등등이다. 순간의 발화이며 영원히 지속되는 시간이다. 모든 것이 우글거리는 무한이며 무한의 입장에서 보면 조그마한 구체로 얼룩덜룩한 더미다. 내 현실의 일정 분량을 언어로 잘 싸서 보관하거나 보여줄 수 있다. 이렇게. 꿈속에서 나는 슬펐다. 이런 문장으로. 슬픔이 꿈의 안팎을 가로지르는 선을 뭉개두었다. 이렇게도 쓸 수 있다. 슬픔은 꿈 바깥으로도 나를 따라왔다. 아니, 꿈 바깥 역시 꿈속의 슬픔이 만든 세계의 일부였다.
그리고 슬픔. 슬픔이라는 단어가 있어서 좋다. 슬픔을 슬픔이라고 쓸 수 있다는 사실, 슬픔이라는 2음절 단어를 발음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이 아주 작은 것이라는 사실, 이 단어와 글자에 부피가 없다는 사실이 좋다. 그 꿈. 나를 슬프게 했던 꿈. 나의 슬픔을 구성하고 있는 꿈. 나의 슬픔. 나의 슬픔이 ‘슬픔’이라는 단어에 안전하게 담겨 있어서 좋다. 단어가 아무리 투명한 외피를 입고 있다고 해도, 모두 이 글자를 볼 수 있다고 해도 이 단어에 고여 있는 슬픔을 정말로 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나를 포함하여. 이것을 들여다보면 누구라도 볼록하고 매끈한 표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중첩된, 내부라고 여겨지는 무언가를 보게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