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상태
투명성이라니, 복잡한 질문이군요. 하지만 이런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투명성 아래 배치하고 싶은 유일한 사물이 있다면 그건 얼굴일 거라고요. 제 얼굴인지, 타인의 얼굴인지, 타인의 것이라면 특정한 어떤 타인의 얼굴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사물이 얼굴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투명성 안에 완벽히 속하도록 던져두는 것, 깨끗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일을 바란다는 건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지요. 타인의 얼굴과 제 얼굴이 관계하는 방식으로서의 마주 봄 사이에는 언제나 반투명한 막이 존재하거든요. 유리창 안팎의 두 사람처럼 말입니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있다면 얼굴이란 이미 투명성 아래 놓여 있는 것 아니냐고요? 아니, 아닙니다. 저에게 투명성이란, 완벽한 투명도를 갖춘 것이란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너저분한 막을 거쳐 볼 수 있음이 아니라요.
세계 안에 놓인 채로 시간의 더께를 쌓아온 우리의 몸은, 우리의 몸이 가진 눈은 그 자체로 얼룩덜룩한 막입니다. 마주 봄이란 이런 막들을 거친 수많은 시선과 시간의 더께가 쌓인 얼굴을 네 개의 너저분한 눈동자가 상호 응시하는 일이고요. 저는 질량 없는 상으로 포개지는 여러 겹의 이미지가 아니라 깨끗하고 순수한 상태로 놓인 하나의 단일한 이미지를 바라보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런 이미지로서의 얼굴을요. 깨끗하게 직시하는 것, 뒤엉킨 시선 뭉치를 만들어내거나 표정이라는 기호 읽기를 수행하지 않고 눈앞의 얼굴을 보기. 연쇄되는 질문으로서의 보기가 아닌 응답으로서의 보기.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혼동을 통해서만 겨우 뜰 수 있는 것이 아닌 눈을 갖기.
저는 아주 오랫동안 유리창 안쪽의 형상들, 그 형상들이 행하는 동작에 포개지는 윤곽으로 존재함으로써 나의 움직임을 견뎌보려 했습니다. 제가 분명하게 보고 있는 것, 눈앞에서 확실한 현실로 동원되며 미래를 실행하는 듯한, 물질을 가진 몸들에게 저라는 형상을 겹치는 동작을 수행하기. 이 수행을 통해서만 저 자신 역시 현실이라는 사실을 견딜 수 있었지요.
빛이 맑고 날카로운 가을 한낮, 저의 윤곽이 햇빛 속에서 날카롭게 오려지는 순간에도 유리창 앞에 서면 뿌옇게 흐려지며 어른거리며 포개지는 겹겹의 형상으로, 절반쯤은 추상이고 절반쯤만 구체인 사물로 움직일 수 있지요. 그러니까 저에게 주어진 투명성이란, 저의 생활을, 저와 세계의 관계를 유지해 주던 투명성이란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모든 것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것이었어요. 이미지들 사이의, 현실 사이의, 질서 사이의 거리를 중첩과 유사성으로 끌어당기는 것이었지요. 어떤 표정을, 습관을, 몸짓을, 마음과 마음의 표현을, 행동 양식을 다른 몸들과 비슷하게 재현하기 위한 수행 없이도요. 세계에게 익숙한 이미지가 되려는 속임수 없이도요.
유리창은 우리를 끝없이 서성이게 하고, 같은 자리를 맴돌며 우리의 보기를 조정하게 만듭니다. 세부를 지우고 해상도를 낮춤으로써, 보는 행위의 일부를 무용하게 만듦으로써 무한한 관찰을 가능하게 한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유리를 사이에 둔 채로만 볼 수 있습니다. 유리 위에서 벌어지는 반사, 중첩, 투영의 상호작용 안에서만 눈을 사용할 수 있지요. 제 자신의 가시화를 견딜 수 있고요. 저에게 보기란 유리라는 겹을 덧댄 채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른거리며 서로를 포개는, 부정확한 채로 흔들리고 흐릿해지는 윤곽들 사이에서만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투명성의 표면은 다른 시간성에 열려 있는 한순간입니다. ‘아직’이라는 시간 안에 도사리는 언어의 가능성이자 언어가 시간성과 장소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 이 사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우리와 현실의 관계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 덕분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언어의 희미한 테두리이며 윤곽의 유동하는 부분입니다. 라이벨이라는 이름이 독일어로 사랑을 뜻하는 ‘Liebe’의 의태어에 가깝다는 사실과 이디시어로 작은 사자를 뜻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현실에 동시에 존재하듯이. 1"독일어로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 ‘Liebe’의 애너그램 같네요[이디시어로 ‘라이벨’은 ‘작은 사자’를 뜻한다]." ―샹탈 아케르만 『브뤼셀의 한 가족』(이혜인 옮김, 워크룸프레스, 2024)의 부록 파자마 인터뷰 중에서.
유리 위에서 모든 것은 기호 바깥으로 미끄러집니다. 우리는 일렁이는 액체 같은 형상으로 다른 여럿과 포개집니다. 다른 사물과 풍경과 시간의 개입, 빛과 어둠의 개입으로 인해, 안팎의 뒤섞임으로 인해 우리 모두는 주어진 언어를 이탈합니다. 차갑고 매끈한 표면은 끝없이 불능을 상기시킵니다. 오직 미끄러짐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장소. 기울기 없이도 우리를 계속 미끄러뜨리는 장소. 우리가 보려는 것들은 얼굴 위를 미끄러지며 지나가는 형상으로 여기 있습니다. 저는 마침내 상실감에 얽매이지 않는 되돌아봄의 감각을 배웁니다. 2Elspeth Mitchell, Chantal Akerman and the cinéfille, 2023
투명성이란 저에게 보기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 조건입니다. 나의 경계는 흐릿하고, 나는 계속해서 어른거리는 표면이 되고, 주변이 나를 침범하고, 아니 내가 주변을 침범하는 것인지 헷갈리고, 우리는 모두 평평하게 뒤엉킨 이미지인 채로만 서로를 볼 수 있지요. 저는 얼룩과 나 자신을 종종 혼동하게 된다고 말해왔는데,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 내부의 나, 너, 나와 너들 역시 그저 얼룩에 불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투명한 표면 앞에서는 가만히 서 있는 것 만으로도 나라는 형상에 움직임이 주어집니다. 내가 속한 공간은 변화합니다. 변화하는 공간이 나와 뒤섞입니다. 나라는 몸은 주변과의 뒤엉킴을 위해 동원된 물질 같습니다. 이런 포개짐 속에서 나는 어렴풋해집니다. 어렴풋한 형상으로 깜빡거리며 세계에 존재합니다. 저는 이 깜빡거림 속에서만 저를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보기를 가능하게 하는 두 눈, 이 두 개의 입구가 하는 운동과 무관하게 벌어지는, 내 눈꺼풀의 깜빡임과 어긋나며 움직이는 투명한 표면 위에서의 포개짐을 통해서만요. 투명한 표면의 일부를 겨우 반투명한 것으로 변화시킬 뿐일 미미한 형상으로만, 엷고 얇은 색채와 흐릿한 윤곽으로만 드러나는 몸. 몸을 비장소로 느끼는 순간에는 덜 어렵게 저의 몸을 견딜 수 있습니다.
기억들이 연약하게 각인된 표면. 주관적인 기억들이 입김처럼 잠시 맺힌 얼룩이 되는 표면. 투명한 표면은 언제나 딴청을 피웁니다. 투명한 표면은 물질로 존재하지만 스스로의 물질성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아니라 성질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투명성이라는 특성 자체로 세계에 덧입혀진 것처럼 있을 따름입니다.
유리 표면은 언제나 투명과 반투명 사이를 오가며 무언가의 반사 혹은 투영으로만 존재합니다. 투명한 표면은 기다릴 뿐입니다. 무언가가 자신의 피부 위로 드러나기를. 덧입혀짐을 통해 보이는 것으로 현현하기를. 유리는 단일한 대상을 담거나 비추는 것에 집중하지 않는 산만한 표면입니다. 산만함을 도구 삼아 유동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표면입니다. 투명한 물질은 부산스레 움직이는 형상이 됨으로써, 산만하게 주변을 드러냄으로써,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시간 안에 존재할 수 있는 표면입니다.
유리라는 표면은 스크린의 빛과 닮은 것이기도 하지요. 앞에 놓인 대상을 비추는 유일한 광원이 되는 동시에 대상이 응시하는 것을 자기 자신으로 둔다는 점에서요. 유리에 비친 나의 얼굴은 영사된 장면이 자아내는 빛이 어른거리는 스크린 앞의 얼굴과 닮았습니다. 유리에 비친 나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스크린 내부의 세계가 맞은편에 앉을 관객들을 위해 자신을 구성하듯이, 나 역시 맞은편의 얼굴을 위해 나의 얼굴을 침범할 모든 것을 지어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극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나와 시간 사이에는 가느다란 금이 발생합니다. 금은 점점 벌어져 틈새가 되고, 장소가 됩니다. 저에게는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나 지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시간과 나, 시간 안에 함께 머무는 우리 사이의 연결이, 간격이, 관계가 중요합니다. 극장은 시간을 나로부터 박리하는 예리한 칼날 같은 것입니다. 시간으로부터 나를 유예하기. 시간과의 관계 맺기를 잠시 중단하기. 유예와 중단이라는 착각을 가능하게 하기.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라는 범주의 도구입니다. 마침내 나는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보는 동시에 시간이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둘 수 있습니다.
꿈꿔본 적 없는, 그러나 늘 필요했던 이 투명한 표면은 여전히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의 포개진 얼굴이, 포개진 뒷모습이, 저의 얼굴을 소실점으로 둔 채 점점 작아지는 타인이라는 풍경이 눈동자 속으로 소멸하는 몸이 되는 동안에도 시간은 이 표면을 계속 미끄러지고 있습니다. 어딘가 고여 있는 시간이란, 그리고 시간이 고일 자리란 환상일 뿐입니다. 소실점은 언제나 화면 안에만 존재하는 점이라서 자신이 속한 화면 안에서만 부드러운 사라짐, 부드러운 망각, 부드러운 소멸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유리의 성질은 소실점을 흔들며, 소실점들을 포개며, 여러 겹의 점을 커다란 원으로 포개며 점의 안쪽으로부터 시작하는 현실을 가능하게 합니다. 점은 원의 최소 단위이기도 하니까요. 음악을 따르고 춤을 추며 원을 그리는 한 무리의 춤꾼들 사이에서, 함께 춤을 출 다른 몸을 선택하는 질서 사이에서 우리의 움직임이 부드럽게 질서를 이탈하는 춤이 되듯이. 거듭해서 서로를 호명하는 새로운 중심이 되듯이.
유리는 중첩되며 유동하는 배치를 위한 표면입니다. 우리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내부와 외부입니다. 우리는 메아리처럼 서로를 포개며, 서로를 반복하며, 서로를 반사하며 연결됩니다.
여기 유리에 비친 두 소녀의 얼굴이 있습니다. 얼굴 하나가 문득 유리창을 향합니다. 그 얼굴은 자신이 보고 있는 얼굴을, 그 얼굴에 서린 표정을, 표정이라는 기호를, 감정이 동원한 현실로서의 이목구비를 유리 안쪽의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반영이 아닌 투영이라고 오해합니다. 착각하는 자는 물론 착각을 믿습니다. 아무런 의지도, 의식도, 자각도 없이 믿게 되는 것이 착각이니까요. 유리는 그 소녀의 착각을 보호합니다. 시간으로부터, 기호로부터, 되돌아봄으로부터, 선명한 윤곽으로부터, 고정된 이미지로부터. 유예와 중단의 방법으로 그 얼굴을, 연약한 질서의 손길로부터 안전한 곳에 둡니다. 주변부를, 시간을, 풍경을, 얼굴과 이어진 몸을, 동작을 삭제한 눈앞의 얼굴을 깨끗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완벽한 투명성이 가능해질 때까지. 너무 깨끗해진 눈앞의 얼굴, 마주 보는 얼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침내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보세요, 깨끗하게 앞을 보는 일은 되돌아보기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을. 장소로부터, ‘이미’라는 시간으로부터, 기호로부터, 물질로서의 우리로부터…… 연속되는 이탈은 사랑의 은유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세요, 우리가 어디까지 볼 수 있는지.
Photo ⓒ Raymond From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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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답변 ‘사랑과 작은 사자’는 샹탈 애커만의 영화 〈브뤼셀에서 60년대 말의 소녀의 초상〉(1994)를 재료로 쓴 것이다.
- "독일어로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 ‘Liebe’의 애너그램 같네요[이디시어로 ‘라이벨’은 ‘작은 사자’를 뜻한다]."―샹탈 아케르만 『브뤼셀의 한 가족』(이혜인 옮김, 워크룸프레스, 2024)의 부록 파자마 인터뷰 중에서.
- Elspeth Mitchell, Chantal Akerman and the cinéfille,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