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여기의 이것의

우리는 눈을 위하여

화환 사이로 새 불을 지켜보고 있었다 ¹“한여름의 불놀이에서 가져온 그을은 화환은 일 년간 조심스럽게 보관했다. 여자아이들은 눈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화환 사이로 불을 지켜보았다.” —루시 리파드, 『오버레이』, 윤형민 옮김, 현실문화A

봐 저기서

타고 있는

녹고 있는

순간 단위로만 가능한 형상을

형태를 상상하지 않는 의지로

흘러내리고 기울며 무게를 따르며 더 뜨거운 쪽을 향하는

순간에 깃든 형상들의

즉흥 기억을

꽃 더미를 만지고 돌아온 유리는

재로 얼룩진

시커멓고 투명한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불도 꽃도 상태일 뿐인데 이렇게

잘 보이고 분명하게 만져지는

냄새나는 물질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고

손으로 목 언저리를 문지르며 말하는 유리의 얼굴은

우리가 여기라고 부르는 간격에서 막 태어난

재료도 상태도 사물도 아닌 이상한

물질 덩어리 같았다

손 위에 접합된 것처럼

손에서 솟아난 것처럼 덩그러니 놓인 얼굴

걔를, 그 얼굴을 유리라고 부른 건

어떤 시간에

어떤 장소에 놓아두고 그게 무엇이든 간에

적어도 어디 놓여있긴 하다는 사실 정도를

사실이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불을 가두며 스스로 빛을 내는

상태가 아닌 불을 원하는 것 같은 얼굴

불 아닌 세계와 접할 때마다 깨지는 표면이 되는 얼굴 아래

유리의 손은

허공을 기어이 표면으로 만들겠다는

부드러운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인다

여름에

눈을 위하여 우리는

그을은 화환 사이로 어른거리는

작고 낡았지만 튼튼한 불을 보며

둥그런 식탁에 둘러앉았다

우리가 있는 곳을 여기라고 여기며

여기라 부르기로 약속하는 얼굴로

매끄러운 표면이 있고

물 한 방울이 그것을 넘치게 하는 순간을

우리 모두는 동시에 보았다

그런 움직임

그 이미지가 우리를 던져두는 공간이 있었고

거기 우리가 있었다

창문은 기이할 정도로 작고 실내는

기척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무엇이든 있을 것 같은

무엇이 있대도 아 그렇군요 하게 될 것 같은

어둠에 잠겨 있다

실내를 점령하고 있는 빛의 전부인

빛이 전부인 창문은

단면인 동시에 온 세계가 쪼그라든 무한인 것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아닌 조그만 끄트머리

그 얇은 한 장의 사각형이 펼쳐지며

세계를 집어삼키며 세계를 뒤덮으며 세계의 전부가 될 것 같았다

이런 빛의 이런 일렁거림 이런 잎사귀들을 통과함 잎사귀의 이런 밀도를

계절과 연결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부터

우리는 두려움을

아무것도 아닌 작은 끄트머리를 움켜쥔 작은 손을

틈새를 보는 법 같은 걸

알게 되었지

자연은 유리가 가둔 매끈한 풍경을

시간을

찢으며 나온다

찢긴 자리에서 본 풍경은 되다 만 잎들로 무성했다

서로를 횡포하게 뒤섞는 빛과 사물과 빛과 어둠과 빛과

섞이지 않는 그림자

우리는 어디에 갖다 놓아도 덤불을 보고야 마는 사물 같았다

얼기설기 얽힌 안쪽을

울퉁불퉁한 표면을 만드는

눈과 손과 귀를 가진 사물

눈이거나 손이거나 귀일 수도 있는 것을 가진 사물

거칠거칠한, 경계투성이의, 손 뻗는 곳마다 잡을 가지가 있는

허공을 아는 사물

물이나 허공이나 짐승이 될 수도 있는 어둠을

딛고 서 있는 사물

아름다움은 덩굴 속에 숨어 있다

덩굴을 잡는 손이 그것을 헝클어뜨린다

불타기 좋은 모양으로 그러모은다

사물은 언제나 기억을 배반하는 방식으로만 움직인다

네가 보는 것들이 너의 얼굴을 침범한다

너의 얼굴은 네가 보는 것들을 침범한다

여름이 유리를 침범한다

여름에

추위에 떠는

매끄러운 얼굴의 유리야

무성해지는 나뭇잎이 자꾸

너의 얼굴을 비껴간다

빛이 너를 빗나간다

너를 빗나간 빛이 실내의 어둠을 불완전하게 만들고 있다

얼굴은 그림자 속에서 돌출된다

붙잡을 가지가 되며 공간의 매끄러움을 방해한다

시간은 돌출된 곳을 표면 삼아 서성이고

너를 빗나간 빛이 시간의 발자국을 붙잡으려 움직인다

곧 방이 녹을 만큼 더워질 거라고

우리 중 하나가 말했지만

방을 구성하는 투명하고 매끄러운 물질에게

세계는 언제나 차갑고

추위 앞에서 깨지는 얼굴이 되는 것은 유리의 의지

부서진 새끼 유리들을 얼굴로 받아내기

만질 수 있는

돌출된 부분으로 만들기

붙잡을 가지가 많은 표면이 되기

빗나간 빛을 부르기

이것은 우리 얼굴들의 의지

시간은 돌출된 표면을 따라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방을 읽으면 문을 만들 수 있다

방 읽는 물질의 기분과 마음과

형태를 상상하지 않는

부드러운 의지에 따라

안쪽의 빛은 문을 가볍게 열어젖힌다

안팎은 다시 배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