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코페이션』 번역 인터뷰
에세이 ‘거의 아무것도 없는 시’에서 『싱코페이션』 작업 과정을 소개해 주셨어요. 특히 끝말잇기와 같은 시집의 형태를, 하나의 규칙으로 미리 정해두고 작업하신 점이 인상 깊었는데요. 번역 또한 염두에 두고 작업하셨나요? 아니라면 번역 전후로 『싱코페이션』에 수록된 시들에 대한 감상이 달라졌는지 궁금합니다.
『싱코페이션』은 말씀 주신 것처럼 이전 시의 마지막이 다음 시의 처음으로 기능하는 일종의 끝말잇기의 형식을 지닌, 연속적이고 선형적인 흐름 위에서 지속되는 시집입니다. 저는 이런 식의 규칙과 제약을, 유한함과 쉽게 교환되는 선형성이라는 속성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스스로 만들어낸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 실컷 응석 부리며 그것을 자유라 부르고 싶은, 자유라는 것을 함부로 말해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이 제게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집은 아무래도 영역본과 함께 출간되는 특수한 형식의 시선집에 속하게 될 것임을 원고 작업 이전부터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번역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시를 쓰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다만 번역될 문장을 미리 상상하거나 예측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요. 쓰는 동안 저도 모르게 영어에게 잘 보이기 위한 한국어 문장들을 쓰게 될까봐 염려 되었기 때문입니다. 절대 영어에게 아첨하면 안 돼..! 그런 생각으로 최대한 번역의 과정과 결과를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너무나 한국적인 문장들이 도리어 의외의 번역문을 생성해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기도 했고요. 그럼에도 제가 생각하기에 외국어라는 관념이 저의 무의식 속에서 유의미하게 작동되었던 시가 한 편 있는데 「미학적 선택으로서의 경계」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작년 뉴욕 낭독회에서 이유나 번역가와 한국어, 영어로 함께 낭독했던 시이기도 한데요. 모든 외국어를 쏼라쏼라 정도로만 번역하고 싶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시입니다. 이 시의 화자는 저처럼 논바이너리라는 젠더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논바이너리nonbinary'라는 단어가 ‘바이너리binary'의 부정어라는 점은 언제나 흥미로운데 관념을 부정함으로써만 가능해지는 부서진 침묵의 자리가 대체로 저에게는 더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시집이 두 언어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시집의 비결정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고 그 점이 쓴 사람인 저에게도 어떤 종류의 자유를 건네는 것 같습니다.
『싱코페이션』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시집 전체가 다양한 리듬으로 가득합니다. 반복되는 시구가 후렴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다정한 말투가 리듬이 되기도 합니다. 저도 시의 운율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으며 번역을 했던 것 같아요. 김선오 시인님에게 리듬은 어떤 방식으로 찾아오나요? 리듬과 이미지, 이야기 사이에서는 어떤 고민을 하시나요?
리듬은 한국 현대시에 관한 논의에서 다소 결락되어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리듬이 언어로 논증되기 까다로운 대상이기에 자연스럽게 논의에서 소외되어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한국 현대 시사에서 운율이라는 개념이 서서히 사라지고 시에 관한 담론이 의미 중심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가 시적 리듬을 도외시 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는데, 이 부분은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시의 의미보다 리듬을 먼저 의식하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양자를 완전히 구별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최근에는 『싱코페이션』의 첫 시 「구름은 벽처럼」을 읽고 포엣몬고 글방 지기인 제 친구가 이 시의 단정짓거나 규정하기를 거절하는 태도가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말의 리듬으로 드러난 것 같다는 피드백을 전해주었어요. 저도 의식하지 못하였는데 정확한 발견인 것 같습니다.
시를 쓸 때에는 리듬이 저에게 찾아온다기보다 말 속에 이미 리듬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을 잘 들으려 노력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말의 리듬을 경청하는 일만으로 몇 편의 시가 쓰이기도 했습니다. 쓰기가 경청의 한 방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제게도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귀를 기울이면 리듬은 어디에나 있고 언어의 음악적 측면 뿐 아니라 표상적인 측면에서도 리듬이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지의 리듬은 언어로 논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한 대상이지만 간단히 비약해 보자면 리듬에 맞추어 이미지를 배치하고 배치된 이미지들의 얽힘을 쓴 사람인 제가 감각하는 일은 저의 시 쓰기에서 중요한 과정 중 하나입니다. 다른 시들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이고요.
유독 『싱코페이션』에는 번역하기를, 또 번역 당하기(?)를 거부하는 화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의 말을 번역하며 미안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어요.) ‘미학적 선택으로서의 경계’에서 “새는 대부분의 외국어를 쏼라쏼라 정도로만 번역하고 싶어”하고, ‘아니에요’의 화자는 “이 길에서는 저 길을 보여줄 수 없어요. 설명할 수도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시인님에게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요? 또 시인님은 세상에 번역 불가능한 말들이 존재한다고 믿으시나요?
시 쓰기 역시 어떠한 번역의 과정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고 지금도 그러한 생각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자아든 세계든 원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믿었고 시가 원본에 대한 모종의 번역이라 여겼기 때문에 그때는 시라는 것이 누락하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렇기에 시를 쓴다는 사실 자체가 꽤 오랜 시간 제게는 콤플렉스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시는 그냥 시이고 원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거나 모든 것이 원본이라는 감각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시가 시로써 생성하는 것들, 말이 말로써 발생시키는 것들에 더욱 관심이 있습니다. 『싱코페이션』에 등장하는 화자들의 번역 불가능성, 설명 불가능성에 대한 발언들은 그러므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역의 행위에 따른 누락 역시 모종의 생성과 발생이라는, 사실은 긍정에 가까운 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번역 불가능성에 의해 침묵의 자리가 생성되고 말씀드렸다시피 그곳은 제가 가장 편안해 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번역을 함께 검토하는 과정에서 세심한 피드백을 많이 주셨는데, 특히 번역본을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고 하셨을 때 큰 감동을 받았어요. 번역된 시를 읽어보는 것은 어떤 느낌이었나요?
시인으로서 스스로의 번역 시를 읽는 일은 독자의 독자가 되는, 시인이라는 몸 위에 두 겹의 독자가 포개지는 이상한 경험인데요. 심지어 번역문을 직접 낭독하고 있자니 제 몸 안에 이유나의 영혼과 김선오의 영혼이 혼재하고 있는 것처럼, 김선오의 목소리와 이유나의 목소리가 동시에 흘러나오는 입을 가지게 된 것처럼 겪어본 적 없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거의 그로테스크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법한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번역된 시에서 어느 부분까지가 제가 쓴 것이고 어느 부분부터를 이유나 번역가가 새롭게 생성한 부분인지 인식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번역시 「It was burdensome trying to become myself [나는 자꾸 내가 되려고 해서 번거로웠다]」에서 ‘번거롭다’는 표현을 ‘burdensome’으로 번역하여 ‘새와 나(Bird and I)’라는 구절과 반복되는 리듬을 만드셨다는 사실은 묵독을 했을 때는 알아채지 못하였다가 낭독을 하는 동안 깨달은 것입니다. 다시 떠올려보니 또 소름이 돋습니다.
시와 산문을 비롯해 영상, 연극, 오디오, 사진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는 김선오 시인님이 마치 언어와 언어 사이를 횡단하는 번역가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작업을 매체 간 ‘번역’으로서 접근하기도 하시는지, 또 앞으로의 작업에 다양한 매체와 언어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 예정인지 궁금해요.
계속해서 번역과 생성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것 같은데요, 이 매체와 저 매체를 원문과 번역문의 관계와 동일시하여 일치율이 높은 번역을 해내는 방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매체로 지속했던 작업이 다른 매체의 작업을 촉발시키는 동력이랄까 의지랄까 영감이랄까 아무튼 그런 것을 만들어내고 텍스트든 영상이든 음악이든 그것이 위치한 자리를 넓히거나 깊어지게 할 수 있는 관점에서라면 ‘번역'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의 매체에 오래 머물다보면 시야가 탁해지는 느낌이 드는데 그때 다른 매체로 몸을 옮겨 다시 기존의 매체를 바라볼 때 새롭게 보이는 것이 존재하는 것 같고 그러한 환기의 감각은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저의 동력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번역은 무엇보다 관계 맺기의 행위이고 매체와 매체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저의 이러한 수행을 번역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번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에 쌓인 더께들을 걷어내고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 선행해야 하는 것 같아요. 그 과정이 번거로워서 저의 이러한 작업 방식을 가리키는 조금 더 나은 표현이 존재한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