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업(SketchUp) ¹SketchUp. 좌표축 위에서 시작되는 3차원 모델링 툴. 실존하지 않는 공간을 직관적으로 구축하고, 밀고 당기며 면을 생성하고 삭제하는 방식으로 형상을 조작한다. 축척, 중력, 재료의 저항 없이 그려지는 공간은 설계라기보다 제스처에 가깝다.

무릎 담요를 덮고 책을 읽다 선잠에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 귤이 어디에나 있었다. 무릎 위에 쌓여 있고, 식탁 위를 굴러다니고, 냉장고 신선칸에 가득했고, 침대맡에서 수면등의 노란빛을 반사하며 실내에 따뜻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특별한 점은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겨울이라고 생각했다. 어디에나 귤이 있었으므로 바깥이 몹시 추울 것임을 알았다. 손 닿는 곳에 항상 귤이 있었으므로 내가 따뜻한 안쪽에 있음을 알았다. 꿈속의 나는 꿈 바깥에 몸을 두고 온 것 같았다. 귤이 가득한 실내를 보고 있었지만 실내와 접촉한 몸이 느껴지지 않았다. 꿈에 반입하기 쉬운 눈만이 세계와 접촉하고 있었다. 발바닥이 땅과 맞닿는 익숙한 느낌도, 무릎 위의 담요도, 소파에 파묻힌 엉덩이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다만 귤을 느끼고 있었다. 윤기가 촉각으로 변환되는 귤. 약간 차갑고 울퉁불퉁한 귤의 표면과 손가락의 접면. 껍질을 깔 때 틈새에서 분사되는 새콤하고 달큼한 향기. 좁은 범위의 사방으로 튀는 미세한 과즙. 과육의 표면을 감싸고 있는 하얀 섬유질. 하얀 실이 얽힌 것 같은, 미로 같은 그것을 만지고 떼어내던 손의 기억이 꿈에 지형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곳은 춥지도 덥지도 따뜻하지도 않았으나 귤이 여기저기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계절을 증명하고 있었다. 물론 귤을 먹을 수는 없었다. 귤은 다만 몸 없는 이에게도 추위나 따뜻함을 느끼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몸은 여전히 꿈 바깥에 있었고, 나는 손끝이 노래지는 느낌과 함께 있었다. 기억과 깊이 연루된 물체는 사라질 수 없다. 나는 너무 깊이 기억되는 것을 조심하면서 귤을 깐다.

짧은 낮잠에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며 잠에서 빠져나오려 애쓰는 동안에도 잠 바깥으로 새어 나온 향이 코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꽃 같기도 하고, 풀 같기도 하고, 꽃이나 풀이라기엔 단내가 섞인, 꽃잎을 뜯어 손으로 비볐을 때 손끝에서 번지는 향과 닮은, 물기가 살짝 감도는 청량한 냄새. 반투명한 막처럼 드리워진 잠을 구멍 내며 훅 들이닥치는 것. 그때 그것이 포도 꿈이었다는 걸 알았다. 일종의 골격이랄지, 중심이랄지, 뼈대랄지. 그런 가느다란 가지가 있고 가지 끝마다 완전한 구에 가까운 커다랗고 둥근 알이 달린 것. 서로의 윤곽에 간섭할 만큼 가까이 붙은 여럿. 시선을 쓰다듬듯이 부드럽게 존재하는 표면. 그것을 똑똑 떼어내어 하나씩 건네는 손이 있는 꿈이었다. 포도알을 건네는 손끝, 얇고 반투명한 피부가 미량의 살과 핏줄을 감싸고 있는 곡선. 손가락 사이에 이것만이 갓 태어난 자연이라는 듯한 연둣빛의 포도알이 있다. 완벽한 빛깔과 둥글기, 빛이 고여있는 투명한 내부 때문에 그것은 도무지 자연 같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것을 건넨 이가 빚은 것 같았다. 이가 닿으면 사납게 터져 나오는 안쪽의 투명한 연둣빛. 입안에 고이며, 증식하듯 쌓이며, 여러 개의 동그란 방을 만들듯이. 닿은 손가락은 연하고 부드러웠고, 그런 손가락이 더 연한 것을 쥐듯 사랑하는 것을 다루듯 알알이 따서 건네는 구. 그런 아름다운 원형 앞에서는, 그런 손길 앞에서는 누구라도 자신이 아는 가장 좋은 것을 떠올리게 된다.

지난밤에도 꿈을 꾸었다. 꿈에서는 그것의 이름이 망고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 둥그런 형태, 자신이 놓인 꿈이라는 환경을 여름으로 바꾸는 재능, 실내인지 실외인지 모를, 여름이라는 인지만 가능했던 공간을 가득 채우며 콧속으로 훅 밀려들던 냄새, 냄새에 서린 단맛, 광택 없이 보드랍고 매끈하던 표면의 촉감, 그것이 여름 초입의 피부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의 꿈이 망고 꿈임을 증언하고 있었다. 이불 속에서 눈을 깜빡이며 망고라는 단어를 천천히, 조용히, 여러 번 발음해 보았다. 망고라는 이름은 입안에서 굴러다니기 좋구나. 동글동글한 발음을 갖고 있는 망고. 둥근 형상을 미세하게 조정하며 자신을 빚는 다양한 망고. 둥글다는 말 안에서 더욱 길쭉하거나 더욱 둥글거나, 노란빛 안에서 옅어지거나 무지갯빛을 끌어들이거나. 칼날 아래서 안쪽의 노란빛을 누설하는 망고. 더위에 섞인 냄새로 기억되는 망고. 여름 햇빛을 응축한 것 같은 부드러운 노란빛 망고. 그러나 꿈 바깥의 망고는 4월에 가장 맛있다. 4월 저녁, 선선한 공기와 접촉하는 노란빛. 둥글게 뭉친 여름이 입안에서 터져 나오듯 환하게 빛나는 맛. 망고의 안쪽에는 넓적하고 단단한 씨앗이 뼈처럼, 망고의 노란빛을 가르는 수평선처럼 있다. 가느다랗고 단단한 수평선에 모인 빛을 뿜어내는 것처럼 봄을 가로지르고 있다.

꿈을 복기하는 일은 손금을 한 사람이라는 입체로 세워 설명하는 일과 같아서 쉽게 피로해졌다. 증거도, 증언도, 유물도 없이 다만 장면으로, 기억이라는 형태의 사실로 존재하는 일의 먼지를 걷어내고 복원하는 일. 이런 노동은 몸을 거칠게 잠에서 건져냈다. 잠도 꿈도 현실도 아닌 곳, 셋 모두의 테두리가 겹치는 실금 같은 장소에 몸을 두게 만들었다.

거기서, 그러니까 꿈의 안팎 어딘가에서 동사를 모두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깸을 잃어버린 상태의 꿈도 꿈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깰 수도, 꿀 수도 없다면 꿈 역시 그냥 문 없는 입구를 가진 하나의 장소일 뿐이다. 움직임을 가질 수도, 움직임을 가진 것에게 보이거나 만져질 수도 없다면 입체 역시 여러 장면을 한데 모아 여러 각도로 배치한 것일 따름이다. 하나의 얼굴은 여러 개의 평면으로 쪼개진다. 물질은 눈에 저항하지 않는 재료가 된다. 입체는 선의 기억과 기억의 집합이다. 활달한 기억만이 이런 밑그림을 입체로 세우려 한다. 너는 무수한 기억이 살점처럼 달라붙은 몇 개의 선으로 거기 있다. 귤과 너는 35도 각도의 장면을 가진 평면이 되어 서로를 마주한다. 포도와 냉장고와 귤과 담요와 칼날과 망고와 수평선과 봄이 서로를 착각한다. 한알 한알 랩으로 감싼 포도의 연둣빛 위로 더 쏟아지는 빛, 빛나는 징그러움, 사납게 입안을 점령하는 단맛, 희고 부숭부숭한 곰팡이, 시큼한 부패의 냄새, 수평선, 이것만이 갓 태어난 자연이라는 듯한 연둣빛, 반투명하게 빛을 통과시키는 손가락이 정지한 장면으로 곳곳에 배치된다. 운동은 아주 조그마한 시간 단위로 쪼개진 정물이 된다. 눈의 정면에 위치한 창밖으로 빗방울들, 수평선, 수면의 동그란 파문이 배치된다. 너는 네 옆에 놓인 측면의 입에 귤을 하나 까서 넣어주고 싶다. 포도 한 알을 톡 떼어 입에 넣어주고 잘 벼린 칼로 잘라낸 망고 과육을 밀어넣고 그 순간 입안을 채우는 단맛, 그런 식으로 야생을 알려주고 싶다.

너는 선들이 입체로 부풀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