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의 정면

유리를 자르는 칼이다 이걸 네게 선물로 주마, 이 칼로 말할 것 같으면 칼도 자르는 칼입니다…… 어디선가 뒤섞인 목소리들이 들려오는 것 같다고 느꼈을 때 너의 손은 칼을 잡았다. 칼을 다룰 때는 어디를 쥐어야 하는지 배운 적 없는 깨끗한 손. 흰 부분을 모두 떼어낸 귤의 표면 같은, 연하고 신선한, 아주 조그만 너의 손끝이 거의 칼날에 닿았을 때 누군가 날랜 동작으로 네 손을 거뒀다. 손끝에는 벌써 잘 벼린 칼끝의 형형한 빛이 박혀 있었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 법. 무사히 칼자루를 쥔 네 손만이 분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부러질 지경의 상다리, 형형색색의 음식이 발하는 광채, 그 광휘에 휩싸인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 잔치를 빛내는 모든 것이. 모두 네가 손에 쥔 앞날을 똑똑히 보았다. 그 온도와 촉감이 어디까지 너를 쫓아올지는 모르는 채로. 상을 둘러싼 어른들은 네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될 거라고 손뼉을 치고 술잔을 부딪치고 사진을 찍으며 기뻐했다. 조금 전, 거의 칼날에 닿은 네 손을 거두던 속도를 모두 잊은 것처럼. 너에게 칼은 은유가 아니다.

칼을 선물 받은 인물에게 기대할 수 있는 사건은 상상하기 쉽지. 우리 상상을 헝클어 볼까. 아니야, 정말로 상상해 보자. 눈앞에 보이는 것 말고. 본 적 있는 장면 같은 것 말고. 배운 것을 버리고. 잘 벼린 칼 한 자루로 할 수 있는 일을. 칼과 한 쌍인 것들을. 넘치는 생명력은 안 된다. 너무나 완벽하게 화창하고 맑은 초가을 아침 같은, 파괴적으로 아름다운 날씨는 안 된다. 그런 날씨는 비극을 암시할 따름이다. 잘린 손과는 연을 끊을 수 없는 법. ¹주나 반스, 『나이트우드』, 이예원 옮김, 문학동네, 2018. 그러니 죽음에서 시작하는 것이 낫다. 음습하고 추운 밤이 낫다. 그런 밤이라면 윤기가 흐르도록 갈린 칼날을 치켜들고, 거기 반사되는 달빛을 횃불 삼아, 칼에 씐 빛과 함께 밤을 헤치며 나아갈 수도 있겠지. 유리를 자르고, 전망을 자르고, 잘린 전망들을 이어 붙인 누더기에 비친 너의 얼굴을 하염없이 멀뚱히 바라볼 수도 있다. 조금씩 어긋나며 덩어리를 이루는 것을. 날카로운 이음매를.

상다리를 부러뜨린 음식들도 사라지고, 내려앉은 상에 둘러앉아 그것들을 모조리 먹어 치우던 사람들도 사라지고, 부서진 상다리가 남았다. 그리고 네가 사라져도 남겨질 칼이. 세상에 견고한 것이, 정확한 것이 있다면 오로지 그것뿐일 거라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물성. 보이는 것 이상을 보려 하는 마음을 잘라버리는 서늘한 빛. 몸도 없는 주제에 그런 생생한 서늘함이라니. 산 것의 광채라니. 그것은 몸 없이, 갇힌 데 없이 어딜 가나 있었다. 그러나 설명할 길 없이. 보여줘야 믿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믿게 할 수 없이. 그러나 믿음보다 질기고 멀리 가는, 마음 같은 것 우습게 아는 기억이…… 너는 손가락으로 귤 표면에 붙은 흰 거스러미들을 떼어낸다거나 콩나물 머리를 손질할 때마다 손가락에 박혀 있는 그 감촉을 느꼈다. 마음을 잘라버리고 의지를 사뿐히 넘어 도착하는 기억. 곤한 잠에서 갓 깨어난 얼굴, 잠에서 깨면 따라붙는 질문을 모르는 얼굴로 너는

물론 네 손이 잡았던 칼과 함께 늙어 그저 매일 아침 사과 한 알을 깎아 먹는 노인이 될 수도 있다. 놀러 온 손주들을 위해 아끼는 접시를 꺼내고 사과를 깎아 내놓는, 적막한 생활을 깨뜨리는 일요일을 가진 노인. 네가 깎은 사과를 너의 손주들은 무서워했지. 토끼 모양 사과를 놓고 통곡을 하며 울었지. 사과의 뼈대를 드러내듯이, 드러난 뼈를 다시 얇은 막으로 켜켜이 분리하듯이 사과를 깎는 너의 칼. 칼을 잡은 손. 너는 평생을 이 손에게 충실했다. 잘린 손과는 연을 끊을 수 없는 법. 손만이 볼 수 있는 것이 있는 법. 보이는 것 이상의 무엇을 보겠다는 마음 너머에 손이 있다. 미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온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