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손 ¹단행본 『시차 노트』(문학동네, 2023)에 수록되어 있음.

《새 손》 ²김리윤 개인전 《새 손》, 2023.8.25 ― 2023.9.16, 전시공간 리:플랫 을 위한 연계 텍스트

손을 펼친다. 펼쳐진 손이 허공에 놓인다. 손목이 지워진다. 팔이 지워진다. 팔과 연결된 몸이 지워진다. 유령처럼 떠 있는 한 개의 손과 손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는다. 장면 바깥을 잘라내는 사각의 프레임처럼 손의 연장된 외화면으로서의 신체가 소거된다. 손은 그 자신의 존재 이유와 발생 맥락인 몸을 잃고도 여전히 손인가. 몸 없는 손이 움직인다면 움직임의 목적은 어떠한 모양으로 흩어지는가. 손의 움직임은 얼굴을 짐작케 하는가. 역동적이거나, 기민하거나,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손의 움직임에 따라 자꾸만 달라지는 얼굴이 도래한다. 손은 스스로 변형되는 방식으로 감정의 형상을 빚는다. 손이라는 표정이 자신을 응시하는 몇 개의 눈을 멈추게 한다면. 이 손은 어느 환상의 입구가 되는가.

시선을 받아내는 손. 움직임을 목격시키는 손. 손이 하나의 풍경이라면 그 단단한 물성과 돌출적인 형태로 인해 자신이 위치한 다채로운 배경을 모두 평면적인 바다로 만들어버리고, 스스로는 바다와 명료하게 구별되는 하나의 섬으로서 문득 솟아날 것이다. 풍경이기에 움직이고 풍경이기에 응시되는, 풍경이기에 이미지가 될 수 있는 작은 육지. 배경으로부터 도드라질 때 손이라는 섬은 잠시 움직임을 멈춘 정물처럼 보인다. 정물은 앞뒤의 시간을 휘발시키고 영원한 현재에 머무르는 것처럼 여겨지는 대상이지만, 동시에 정물의 역능을 통해 발생가능한 상상의 장면으로 휘발된 시간의 자리를 채울 수 있도록 능동적인 빈 공간을 만들어낸다. 정물로서의 손은 그러므로 복원과 파괴의 행위를 동시에 불러들인다. 되살아나며 무너지는 파도의 시퀀스가 손이라는 섬의 시공간을 부드럽게 채우고 있다.

손은 만들며. 손은 부순다. 얇은 피부에 둘러싸인 손. 작고 정교한 뼈들이 들어차 있는 손. 생성하는 손은 신의 움직임을 그려보게 한다. 손을 바라본다. 손을 섬기고 싶은 마음을 단속하면서. 이 거대한 도시의 전체는 왜소한 손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것이지만 반대로 가장 연약한 것을 손길의 대상으로 불러올 수 있다면. 우리는 얇은 종이 한 장을 떠올릴 수 있다. 손은 종이를 찢거나 구겨 버리는 방식으로 훼손할 수 있지만 어떤 손은 종이를 정해진 순서에 따라 접는다. 종이에게 부피를 주어 한 차원 높게 끌어올린다. 학을, 꽃을, 상자를 불러온다. 종이접기는 믿음과 움직임을 통해 형상을 불러오는 주술적인 호출이다. 접혀 있던 종이를 손이 펼칠 때 종이학, 종이꽃, 종이상자는 사라지고 투명한 직선들만이 형상의 흔적이자 기호로서 종이 위에 남는다. 종이라는 불투명을 가르는 투명, 불투명과 불투명을 구분하는 투명이다. 종이 옆에 놓여 있는 손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종이 안에 잠재되어 있는 형상들을 본다. 손의 움직임이라는 과정 속에 놓일 때 복원과 파괴의 개념은 같은 얼굴의 다른 표정처럼 쉽게 뒤척인다.

펼쳐진 종이는 위태로워 보인다. 여러 번 접혔다 펼쳐진 자리에 남은 투명한 직선들이 불투명한 종이를 찢고 새로운 윤곽이 되려 한다. 종이는 그 자신의 연약한 속성에 의해 쉽게 분할되지만 분할을 모종의 생성이라 여길 수 있다면 우리는 연약함이라는 속성의 기능을, 혹은 연약함이라는 새로운 통로의 등장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이가 찢어지듯이. 찢긴 종이가 버려지듯이. 종이의 찢어짐이 대개는 우리의 목적이 아니듯이. 연약함이라는 속성은 실패라는 사건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실패는 부드럽고 납작하게 펼쳐져 있다. 종이는 젖었다 말랐다. 접혔다 펴졌다. 그 모습 그대로 여기에 있다. 목적과 수단의, 성공과 실패 사이의 경계가 느리게 지워진다. 판단이 부재하는 장소에서 연약함의 부정성은 탈각되고 아름다움은 돌출된다. 그리고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말없이 행하는, 손이 있다.

손이 있다. 손 하나가 허공에 떠오른다. 손 하나가 허공에 떠오른다,는 말을 통해 손 하나가 허공에 떠오른다. 이것을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나. 손에 대한 기억들이 손의 형체를. 허공에 대한 기억들이 허공의 형체를 구성한다. 나는 이 허공을 밝은 방의 안쪽에 들여놓고 싶다. 삼면이 창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유리에 달라붙은 두터운 먼지 탓에 바깥의 빛이 그 안에 쉽게 도달하지 못하는 방. 빛의 느린 도착에 의해 허공은 섬세하고 은은하게 구현된다. 바깥 풍경은 해상도 낮은 사진 액자처럼 벽면에 걸려 있다. 방의 안쪽은 창이 아닌 엷은 피막을 통해 외부 세계와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그 방에 떠 있는 한 개의 손을 떠올린다. 이 손은 언어와 이미지 사이 어딘가에 있다. 둘 중 하나로 쉽게 환원되지 않는다.

손짓. 손길. 손사래. 손의 움직임에 관한 구체적인 기호들이 손이라는 정물을 추상의 바다에서 잠시 건져 올리는 것 같다. 말로 구성된 손이 있다면. 그 손의 여기저기에는 구멍이 뚫려 있을 것이다. 손톱, 손등, 손가락, 손바닥, 손마디, 손금…… 우리는 손의 작은 부위들을 지칭하는 이런저런 단어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손바닥과 손등을 잇는 손의 옆면, 손마디 위의 숱한 주름들, 손가락과 손등을 잇는 동그랗고 튀어나온 뼈, 그런 것들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이미지를 더듬거리며 묘사할 뿐이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부재만큼 손의 형상에 구멍이 뚫린다. 그곳에 손의 이미지가 들어찬다. 언어와 이미지가 씨실과 날실처럼 엮이며 짜 올린 손 모양의 그물이 방 안의 흐린 빛 속에서 넘실거린다.

손을 손이라는 말로 부를 때. 손은 자신의 윤곽 안에 손의 이미지를 붓는다. 혼합된 손의 이미지들은 개별성을 잃고 추상화되며 비유의 자리로 내몰릴 것이다. 신의 손. 큰손. 보이지 않는 손. 손은 설명을 위해 도용되어 왔다. 이곳은 창조, 운용, 파괴 등의 개념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상징물로 소요되는 동안 잃어버린 손의 면면들이 복원되는 방이다. 반면 손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말들이, 손에게 시공간을 선물하는 동사들이 있다. 손에 땀을 쥔다거나. 손에 물을 묻힌다거나. 손에 익다, 같은 말들. 개념이 아닌 일상적인 움직임을 드러내기 위해 손에 기대는 말들. 이런 말들이 손의 동작을 손의 내부로 불러들여온다. 동작은 손의 내부에서 촛불처럼 켜지며 손의 형상을 밝힌다.

글 쓰는 손이 글쓰기라는 목적을 유실할 수 있다면. 내용 없이 쓰는 동작만을 남길 수 있다면. 잉크 없는 펜으로 쓰는 글처럼. 백지에서 다른 백지를 불러오기 위한 손의 움직임이 있다면. 펜을 쥔 손은 끄덕거리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했다가 종이의 우측 모서리에서 좌측 하단으로 다시 점프할 것이다. 움직임은 반복될 것이다. 글씨 대신 움직임이 종이 한 장을 채울 것이다. 손은 정신의 작용을 종이 위로 운반하지만, 운반된 것은 없다. 움직임만이 생성된다. 이러한 움직임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 종이에 쌓인 글자들 대신 쓰는 동작의 지속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 종이가 어느 시공간에 놓여 있든지. 종이 위의 손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면. 손이 옮기는 글자 대신 손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면. 그 눈이 생성하는 그림이 있다면. 그림은 한 사람의 정신에 기입되고. 기입된 그림은 또 다른 움직임의 기원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반복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적힌 글자 곁에서 글자를 적는 손의 움직임은 눈의 목적이 된 적 없다. 쓰는 움직임은 목격되지만 기억의 공간에서 글자에게 우위를 빼앗긴다. 의미에 동조하지 않는 손의 움직임을 떠올린다. 어떠한 추상에도 기여하지 않는 움직임을. 눈을 위한 대상을 만들어내야 하는 도구의 위치에서 시선의 목적의 자리로 손을 구출할 수 있다면. 손이 손으로서 눈의 운동을 잡아채 고정시킬 수 있도록.

끝없이 움직이는 손의 피로를 본다. 사물이 움직이기에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며 이러한 움직임이 이미지를 발생시킨다. 눈이 떠지는 순간부터 감기는 순간까지, 손의 움직임은 연쇄된다. 눈을 감듯이 손을 감을 수 있다면. 눈이 눈꺼풀을 닫음으로써 밀려드는 감각 정보들을 차단하고 어둠 속에 머물 수 있듯이. 손이 손에게 주어진 임무와 자극을 차단한 채 쉴 수 있다면. 그 일이 눈꺼풀 닫기처럼 간단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손을 감는 상상. 손의 움직임을 촛불처럼 꺼뜨리는 상상. 손이 움직임을 멈출 때에도 손이 만든 물건과. 손이 해낸 건축과. 손이 써낸 글이 적힌 종이가 어지럽게 늘어져 있는 자리를 바라보는 눈이 있다. 손의 흔적을 바라보는 시선이 손의 흔적으로부터 손을 떠올린다. 손이 사라질 때 열리는 눈이 있다. 그 눈이 그려내는 새 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