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증은 눈 속에 있는 혼탁 물질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물질은 보고자 하는 방향을 따라다닙니다. 1서울아산병원 질환백과.
나는 몇 겹의 꿈속을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그 꿈에서 시공간은 베이커리 쇼케이스에 쌓여 있는 여러 개의 롤케이크 같은 형상이었는데 나는 마치 단 것을 좋아하는, 머리 쪽에 견고한 집게가 달린 한 마리의 벌레처럼 이 롤케이크에서 저 롤케이크로 동그란 구멍을 뚫으며 이동할 수 있었다. 나의 걸음이 여러 개의 터널로 변모하며 시공간을 잇고 있던 셈이다. 물론 이것은 꿈속의 이야기다.
하늘과 땅은 부드러웠다. 시간에서는 단 맛이 났다. 다른 롤케이크에 진입하면 등 뒤의 터널은 웅성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봉합되었다. 분홍색 땅이 펼쳐진 곳에서 돌아가신 중학교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낙엽을 밟지 말렴.” 선생님의 당부에 따라 조심하며 걸어간 곳에서 구름은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하늘의 모서리에서 폭포처럼 낙엽처럼 떨어졌다. 이번에는 구름을 피해 걷던 길에 막다른 골목에서 네 살 무렵 난데없이 가출했던, 흰색 나시를 입은 어린 나를 만났다. “무슨 생각으로 집을 나갔니?” “생각은 생각이고 집은 집이니까.” 아이가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생각일 뿐이었으며 아이의 얼굴은 사진처럼 고정된 형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자코메티 조각처럼 마르고 작은 몸은 입체였지만 얼굴은 평면이었다! 키득키득 웃으며 어린 나를 놀렸다.
놀리다보니 나는 그 아이가 되어 있었다. 아빠 차 뒷좌석에 실려 어디론가 가는 중이었다. 국도는 차 한 대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멀미를 느껴 누운 뒷좌석 사이즈가 키에 딱 맞았다. 등으로 울퉁불퉁한 도로의 굴곡을 느꼈다.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노란색 동심원이 퍼져나갔다. 맑은 날이구나. 맑음은 눈 속에도 있구나. 눈을 떴을 때 희고 투명한 지렁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길고 작은 몸에 검은 점이 몇 개씩 박혀 있었는데 지렁이라기에는 먼지처럼 다소 부피가 없었고 시선을 옮기면 시선의 방향을 따라 함께 움직였다. 눈 닿는 곳에 지렁이. 나를 따라오는 투명 지렁이. 풍경과 지렁이 사이의 경계는 희미했지만 분명히 거기에 있었다.
아빠, 아빠도 보여?
뭐가?
투명한 지렁이 말이야. 둥둥 떠다니는 얼룩 같은 거.
안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나만의 지렁이들이군. 점차로 바다가 되어가는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바다에 시선이 닿기 전 자동차의 움직임과 무관한 속도로 느리게 떠다니는 투명 지렁이들이 보였다. 지렁이들은 내 바라봄의 방식 속으로 들어와 나를 길들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곁눈질로만 보였다. 지렁이를 보려고 하면 지렁이들은 시선의 움직임을 따라 또다시 시야의 한 구석으로 이동해버리기 때문이었다. 나는 술래잡기하듯 지렁이를 보았다. 보기는 일종의 쫓기였다. 나는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로써 지렁이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었는데 (마치 신처럼) 그 과정에서 멀미가 났다. (신도 인간을 바라보며 멀미를 느낄까?) 나의 멀미와 무관하게 지렁이들의 서식지로서 내 눈은 안전한 공간 같았다. 눈 속은 어떠니. 춥거나 덥지는 않니. 지렁이들은 구름 위를 도로 위를 유유히 떠다니며 히히 웃었다. 나는 누운 채로 들썩거리며 또 하나의 터널을 통과했다.
비문증은 실 같은 검은 점, 떠다니는 거미줄, 그림자 또는 검은 구름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시신경유두부에 유착되어 있던 신경교조직이나 농축된 유리체 또는 동반된 유리체출혈이 후유리체박리로 인해 자유로이 유리체강내에 떠다니고 환자가 이를 자각하는 것이다. 후유리체 박리는 유리체 피질과 망막 내경계막이 분리되는 것을 지칭하며 중심와 주변 후극부에서부터 시작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문증 [vitreous floaters]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서울대학교병원)
터널을 빠져나온 곳은 사라진 것과, 사라지는 중인 것과, 사라졌다고 믿어지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워짐이 이 세계의 형식인 것처럼. 그리하여 이곳에 오기까지의 나의 기억 역시 서서히······ 기억이 나의 형식이기 때문일까? 지렁이들은 나와 함께 방금 이곳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당연한 말이다. 지렁이들은 내 눈 속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나는 흰 벽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서 지렁이들은 어느 때보다 자신들의 형상을 맹렬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복잡한 풍경 대신 흰색으로 채워진 지렁이들의 모습은 이례적으로 선명하고 역동적이었다. 지나온 다른 어느 시공간에서보다 그러했기에 나는 지렁이들에게는 이곳만이 현실일 수 있겠다고 내심 확신했다. 이곳에서만큼은 내가 지렁이들의 꿈이다. 흰 벽에도 눈이 있다면. 그 속에도 지렁이들이 살고 있다면. 벽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흰 벽의 텁텁한 눈 속에서 투명한 지렁이들은 내 몸의 형상으로 채색되었을 것이다. 김유림 시인의 『단어 극장』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애니메이션 <이누야샤>에서 이누야샤의 아버지는 죽기 전 자신의 송곳니로 만든 무적의 칼 철쇄아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장소”에 숨겨둔다. 그곳은 바로 이누야샤의 오른쪽 눈 안이다.
내 눈 속에 숨겨진 칼 같은 것은 없으며 다만 흐르는 먼지 같은 투명한 지렁이들이 있다. 흐릿하고 엉성한 비정형의 지렁이들의 윤곽이 흰 벽 앞에서 선명해질 때 그와 마찬가지로 흐릿하고 엉성하며 투명한 글자들이 그곳에 있음을 알았다. 저 글자들은 벽의 눈 속에 있는 것일까? 저 글자들을 읽음으로써 나는 흰 벽과 눈 맞출 수 있는 것일까?
이 전시장에는 관객의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의지를 상실한 무기력한 작품만이 가득하다.
This space is full of only helpless art pieces
that have lost the will to be seen by the viewers.
지렁이들은 점점 더 선명해지는 형상으로, 강렬한 위용을 뽐내며 글자들 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글자들은 잘 읽히지 않았고 나는 점점 읽을 의지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글자들은 볼수록 흐릿해졌다. 흐릿한 것이 비단 글자들뿐이겠는가? 나는 꿈의 안팎에서 만난 그 어떤 이미지라도 보면 볼수록 더더욱 흐릿해진다는 데에 내 열 손가락을 걸 수 있다. 보는 행위는 이미지에 균열을 낸다······ 오래 보고 있을수록 그렇다. 금이 가다 못해 마침내 이미지는 무너지는 것 같고 무너진 자리를 허탈하게 다시 한 번 바라볼 때 그 폐허마저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 눈 속의 지렁이들은 대체 왜······
흰색은 사라짐의 표면 같은 색이었다. 그러나 흰색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 어딘가에서 대충 떠다니던 지렁이들을 존재의 쪽으로 힘차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의 주름진 얼굴, 네 살의 나, 흘러내리는 구름들, 내가 지나온 모든 장면들이 흰 벽과 흐린 글자들 위에서 점점 더 선명해져 갔다. 베르그송은 물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공간 속에 사물들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왜 과거는 사라진다고 생각하는지. 보이는 것들은 볼수록 흐려지지만 보았던 것들은 무엇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명해진다. 내가 이곳에서 깨어나기로 결정했을 때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했던 생각이다. 나는 책의 페이지를 넘기듯 눈을 감았다. 어둠이 과거가 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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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 개인전 《Hovering Duration》의 연계 텍스트로 작성됨.
- 서울아산병원 질환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