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쓰기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우박이 쏟아지는 줄 알았다. 창문을 깨뜨릴 듯 들이치는 반투명한 조각들을 상상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창밖에는 어둠을 깨뜨릴 듯 피어오르는 불꽃놀이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새해였다. 불꽃놀이는 열차가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동안 계속되었다. 작년을 깨뜨려야 올해가 온다는 듯이. 사람들은 밤하늘을 깨뜨리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조급하게 아침을 불러오려는 듯이, 아침의 빛을 미리 던지듯이 폭죽을 터뜨리고 있었다. 나의 느슨한 상상 속에서 작고 거친 우박 알갱이들은 금세 녹아 없어지고 환호하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이 떠오르는 듯했다.

창밖은 어두웠고 어둠의 두께에 비해 기차는 가늘구나. 실타래에서 풀려난 실처럼 땅 위에 가느다란 궤적을 그리고 있구나. 몇 개로 겹쳐지고 갈라지는, 부질없고 옅은 생각들을 떠올리며 좌석에 점처럼 앉아 졸았다. 눈꺼풀 안쪽에서도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번갈아 읽는 동안 세 권의 책은 하나의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서로 다른 음악들처럼 중첩되고 분열되기를 반복했다. 햇볕이 뜨거워서 창문 덮개를 반 정도 내렸다. 반원의 빛이 페이지 위에 이르렀다. 나의 눈에 이르고 사물에 이르고 얼굴에 이르고 장면에 이르러서 대상의 윤곽으로 응고되는 빛. 나와 책의 관계가 살짝 비틀려 있는 이유는 내가 빛이라는 대상을 불순하게 경유하여 책을 하나의 풍경으로 대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행기에 들고 탄 책은 세 권이었다.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의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단편 소설집 『모자』, 최재원 시집 『백합의 지옥』.

어느 순간부터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  이렇게까지 책을 안 읽는 나를 작가라고 해도 될까? 편독하고, 결코 완독하지 않고, 스무 권 정도의 책을 번갈아 펼치며, 첫 페이지에 매료되지 않으면 바로 심드렁한 마음이 되어버리고 마는, 도리어 책장에 질서 없이 꽂힌 책들의 책등에 적힌 제목을 바라보는 일만으로 흡족해져버리는 내가? 읽지 않은 책이 지닌 좋음의 가능성을 읽음의 좋음보다 더 선호해버리는 비겁한 내가? 너무 좋은 책에 매료될 것이 두렵고 그저 그런 책에 심드렁해질 것이 두려워서 책장에 뻗은 손을 금세 거두어버리는 내가? 이토록 무례하고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책을 대하는 내가? 침대 옆 협탁에 쌓아둔 책들을 일 년째 펼치지도 않는 내가? 때로는 흰 종이 위 검은 글자들을 어떤 종류의 얼룩으로만 대하는 내가, 한 권의 책이라는 덩어리진 물질의 생성에 개입하여 저자라는 명목으로 그 책의 운명을 책임질 만한 자격이 있는 걸까?

그러나 동시에 ― 비행기 창문을 통과한 빛이 글자의 표면에 도착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시선을 뗄 수 없기에 읽었다. 쓰여 있는 한국어를 보기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읽히고 나의 머릿속에서 의미로 화했다. 목소리로 들렸다. 촉감으로 느껴졌다.

번갈아 읽는 동안 세 권의 책은 하나의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서로 다른 음악들처럼 중첩되고 분열되기를 반복했다. 햇볕이 뜨거워서 창문 덮개를 반 정도 내렸다. 반원의 빛이 페이지 위에 이르렀다. 나의 눈에 이르고 사물에 이르고 얼굴에 이르고 장면에 이르러서 대상의 윤곽으로 응고되는 빛. 나와 책의 관계가 살짝 비틀려 있는 이유는 내가 빛이라는 대상을 불순하게 경유하여 책을 하나의 풍경으로 대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