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빙 이미지

영화를 찍겠다고 했다. 너무 작아서 그걸로 되겠나 싶은 캠코더를 들고 너는 스물네 시간짜리 바다를 찍겠다고 했다. 자정부터 자정까지. 스물네 시간짜리 바다를 두 개 찍겠다고 했다. 하나는 동해, 하나는 서해. 커다란 화면 중앙에 작은 화면을 중첩할 거라고 했다. 커다란 화면에 바다 하나를, 작은 화면에 다른 바다를 상영할 거라고. 커다란 바다의 수평선과 작은 바다의 수평선이 이어지도록 화면은 배치될 것이다. 한 바다의 일출과 다른 바다의 일몰로부터 영상은 시작된다. 한 바다에 아침이 찾아올 때 다른 바다에는 밤이 찾아올 것이다.

너는 상영된다. 너는 너무 작아서 그걸로 되겠나 싶은 캠코더를 들고 있다. 네가 서 있는 곳이 동해 바다인지 서해 바다인지 화면상으로는 알 수가 없다. 너는 백사장에 삼각대를 고정하느라 한참 애를 먹는다. 짧은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휘날리는 것으로 보아 바람이 많이 불고 있는 것 같다. 너는 운전을 못하니까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갔을 것이다. 너무 작아서 그걸로 되겠나 싶은 캠코더니까 많이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네가 검정색 잔스포츠 백팩을 열고 스타벅스 텀블러를 꺼내는데 그 안에 든 것이 유자차인지 루이보스인지 화면상으로는 알 수가 없다. 너의 입김이 바다를 가린다. 파도가 높지만 입김을 뚫고 서핑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는 서핑하는 사람들을 앵글에 담고 싶지 않아 고민하는 것 같다. 서핑의 이미지가 관객들로 하여금 이 장소는 어느 해변일 것이라거나 촬영 시기가 언제쯤일 것이라거나 하는 등의 불확실한 의문을 소거하게 하는 단서가 될까봐 그러는 거다. 너는 그 모든 가능성이 중첩되어 있는 바다의 이미지를 원한다. 너는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 댄다. 영원하고 무궁한 바다의 상을 바라는 너의 움직임이 클로즈업 된다. 화질이 그리 좋지 않다. 그걸로 되겠나 싶은 그런 캠코더로 너를 찍은 것 같다. 렌즈는 자꾸 백사장 쪽으로 추락했다가 다시 너를 향하고 하늘로 솟구쳤다가 다시 너를 향하고 그런다. 이딴 캠코더로 찍히고 있다는 사실을 네가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가 없다. 너는 오직 뷰파인더에만 몰두하고 있지 자신이 찍히고 있다는 사실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너의 눈에는 너를 향하고 있는 이 렌즈가 보이지 않나. 너의 움직임이 장면의 일부가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나. 알면서 아닌 척 하고 있는 건가. 너는 왜 스물네 시간짜리 바다를 찍겠다고 추워 죽겠는데 그러고 있는지, 누가 스물네 시간짜리 영상을 봐주기나 할 것 같은지, 나는 너무 답답한데 여기서 잔소리한다고 네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장면 속에 있다. 너는 너를 수행하고 있다. 일출인지 일몰인지 알 수 없는 주황빛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서핑하는 사람들의 작은 그림자가 파도 위에서 짙어졌다가 옅어졌다가 한다. 너무 눈부셔서 너의 얼굴은 다 사라질 지경인데. 이제 아침이 올지 밤이 올지 알 수도 없는데. 허리를 구부려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 대는 너의 반복적인 움직임이 무슨 단서 같다. 그러나 나는 모든 가능성이 중첩되어 있는, 영원하고 무궁한 너의 이미지를 원한다.

기차는 자꾸 늦는다.

이미 늦은 것도 또다시 늦는다.

누군가 무궁화호 열차 좌석에 앉아 졸고 있는 나를 보고 간다. 나의 머리가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지며 눈 내리는 창밖 풍경과 뒤섞이지 못하는 모습을. 부풀어 올랐다 다시 가라앉는 흉통의 움직임을. 내 몸의 표면이 그의 눈동자에 잠시 비쳤다 사라진다. 멀어진다. 비틀거리며 열차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나의 눈꺼풀 속에 하나의 상으로 맺힌다.

바람이 계속 부나 보다. 백사장 위에서 카메라가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하는데 너는 자꾸 그것을 일으켜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