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사켓에서 보내는 편지

안녕하세요, 김리윤입니다. 도이사켓에서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을 붙이고 시작했지만, 사실 저는 지금 서울의 한 도서관에 앉아 있습니다. 창문에 반사된 열람실의 흰 사각형 조명들, 동상의 뒷모습, 절단면을 명료하게 드러내며 가지치기 된 관목들이 중첩된 서울의 여름 풍경 앞에 있어요.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하는 저의 몸이 놓여있을 것이라 상상했던 장소들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가 머물던 아티스트 레지던시의 책상 앞, 거의 매일 작업하러 가던 카페의 테이블, 100바트를 내면 종일 물 안팎을 오가며 지낼 수 있던 레지던시 근처 리조트의 수영장 선베드, 치앙마이 공항, 방콕 호텔의 침대, 방콕 공항 탑승구 앞 의자, 비행기 안······ 어떤 장소에도 이 편지를 쓰는 저의 몸을 놓아두지는 못했고, 장소들은 시간 안에서 닫힌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쓰는 편지라고 하는 대신 도이사켓에서 쓰는 편지라고, 이 편지가 쓰일 가능성이 있었던 모든 장소와 이곳 사이에 놓인 간격에서 쓰는 편지라고, 아니면 간격으로서의 시간이 있고, 여전히 존재하는 장소와 풍경들이 있고, 그것들 속의 매듭 안에서 쓰는 편지라고 말해보고 싶군요. 이 매듭의 이름은 도이사켓입니다. 그렇게 우겨보고 싶군요.

이곳에 있는 동안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영상도 많이 찍었고요. 두 대의 필름 카메라와 한 대의 디지털카메라, 아이폰, 김선오 시인의 캠코더를 사용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이미지라는 표면으로 매듭지어져 있습니다. 움직이거나 정지된 이 매듭들을 보고 있으면 본다는 일과 시간이 연루되는 일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매듭에는 주로 우리의 생활을 구성하고 있던 것들이 엮여 있어요. 장소와 사람과 동물들, 사물들, 날씨들. 더 이상 이 이미지 안의 것들이 겪는 시간과 제가 겪는 시간이 한 덩어리가 아니라는 것이, 이 장소들이 마치 VR 속의 세계처럼 움직임을 가진 것인 동시에 시간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매일 보던 창문. 숙소 창문 앞에는 망고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나무에 열린 망고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 그것이 자연과 인공의 묘한 결합물처럼 느껴졌어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누군가 나무에 망고를 주렁주렁 걸어두고 간 것 같았습니다. 어쨌거나 망고는 자신의 자연성을 증명하듯이 매일 조금씩 익어가고 있었고 저는 매일 그것을 지켜보면서 가장 손 닿기 쉬운 곳에 있는 망고 하나를 돌아가기 직전쯤, 가장 맛있게 익었을 때 따먹으리라 야무진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 일어났을 때 나무의 망고는 모두 사라져 있었어요. 다음 날 있었던 오픈 스튜디오 행사 다과상에는 망고가 잔뜩 들어간 샐러드가 있었지요. 나무에 열린 망고 표면의 촉감, 그것을 딸 때 손에 가해질 힘, 갓 딴 망고를 칼로 가를 때의 향기 같은 것들은 모두 상상 속에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우리에게는 매일 보던 창문이 있었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만 매일이 될 것임을 알고 있던 보기. 매일 보기가 종료될 것임을 알고 보던 창밖 풍경의 익숙함과 차이. 타국에서, 여행자의 몸이 아닌 몸으로, 집이 아닌 곳을 거처 삼고 일정 기간 머물러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한시적으로 주어진 일상을 산다는 것은 기묘하고 산뜻한 일이었고, 그것이 주는 편안함과 자유로움이 있었습니다. 삶에는 시간 축을 흔드는 여러 이유들이 있지요. 시작과 종료가 정해진 생활을 삶에 잠시 들이는 일 역시 우리의 시간 축을 부드럽고 미세하게 흔들어 놓습니다. 시간이 고일 움푹한 장소가 생기고, 여기서는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모두 정해진 크기로 조그마하게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시간이 저를 통과하거나 제가 시간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움푹한 자리에서 뒤엉켜 있는 것 같습니다.

저와 김선오 시인은 텍스트바이텍스처Text by Texture라는 이름의 듀오로 이곳에 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결성했고, 저희 자신조차 정확히 무엇을 하게 될지 몰랐던 텍스트바이텍스처는 이곳에서 꽤나 구체적인 형상이기를 시작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표면이 될 몰드를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발생할 여러 우연과 의도를 통과하며 도착할 몰드에 부을 액체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계속 바뀌는 내부를 감싸는 표면, 피부를 유동적인 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계속 바뀌는 표면을 채우는 내부를, 살덩이를 유기적인 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느 쪽이건 이 유동적인 새 몸에 기입될 시간들이, 이 몸이 접할 세계가 기다려집니다. 우리에게 처음으로 기입된 이곳에서의 시간을 생각합니다. 다소 허황되게 작업 게획서를 작성할 때 상상했던 고요한 시간, 태국 북부의 선명하게 넘실대는 초록 곁에서 텍스트 내부를 배회하는 시간 대신 물질과 관계 속에서 움직이며 땀 흘리는 시간이 있었지요. 그러니까······ 결국 이 편지를 상상했던 어떤 장소에서도 쓰지 못했을 만큼 정신없는 날들을 보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들은 태국의 귀신 이야기에서 단서를 얻어 첫 번째 프로젝트인 〈미완 귀신 Unfinished Ghosts〉을 시작했습니다. 아주 간단히 설명하자면 퀴어들을 위한 귀신—신을 만드는 프로젝트인데, 조만간 아지테이트를 통해 더 자세히 소개할 수 있을 거예요. 귀신은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 한때 인간이었던 존재, 인간의 앞날을 보거나 인간의 소망을 들어주는 존재입니다. 귀신은 몸 없는 존재인 동시에 자신에게 필요한 몸을 갈구하는 존재이기도 하지요. 귀신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들어주는 존재이며 우리의 이야기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했어요. 사람들의 이야기, 얼굴과 포개진 이야기, 목소리를 가진 이야기, 목소리 안에서 살아 있는 이야기. 그리고 필름 카메라로 이야기를 들려주었거나 들려줄 사람들의 얼굴을 많이 찍었습니다.

태국에 오기 직전에 했던 대담을 앞두고 받은 질문지에는 얼굴은 저에게 어떤 물질이냐는 질문이 있었어요. 실제 대담에서는 이 질문을 제외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곳에서 어느 때보다 많은 낯선 얼굴의 이야기를 듣고, 그 얼굴들을 찍으면서 틈틈이 이 질문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얼굴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과 다른 이상한 물질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감정만이 생생한 현실 같다는, 실재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며 진실이라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가상의 개 한 마리가 있고, 그걸 정말로 사랑하게 되어버린 누군가가 있다고 칩시다. 개가 아니라 인간이거나, 개미이거나, 코끼리라도 마찬가지고요. 어쨌거나 어떤 개가 있고 내가 그 개를 너무 사랑한다면, 개가 허구일지라도 사랑은 너무나 생생한 현실로 실재합니다. 공포나 슬픔 같은 감정 역시 마찬가지고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있지요. 나를 놀라게 한 것이 자라가 아니라 솥뚜껑이었음을 알게 된다고 해도, 자라라고 착각한 순간의 놀란 감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순간 속에 여전히 맺혀 있지요. 그런 순간들, 생생한 현실들, 세계와 나 사이의 오해나 착각 진위와는 무관하게 여전히, 너무나 진짜인 감정들은 그 자리에 남아 시간을 감당합니다. 이런 것들로 얼굴은 얼룩덜룩합니다. 얼굴은 감정과 시간이 뒤엉킨 얼룩덜룩하고 구체적인 덩어리입니다. 마주 보는 얼굴은 나와 동시적인 시간에 존재하는 물질인 동시에 과거와 엉켜 있고 미래를 품고 있어 지나간 시간도, 도래할 시간도 현재에 엮인 채로 함께 움직이며 보이는 것으로 만듭니다.

언젠가 메모해 두었던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문장의 두 가지 힘이 살과 피를 가진 자에 의해 말해지며, 순간적으로 발화되는 동시에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태국에 머무는 동안 시간을 유영하며 떠도는, 지속되는 이야기와 그 안에 잠시 머무르는 인간의 존재가 새삼스럽게 이상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각각의 낱말들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완결되지 않는 귀신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픔이라는 단어는 이 단어를 사용했던 인간들, 피와 살을 가진 자들이 느꼈던 모든 슬픔이 깃든 채 이 세계를 영원히 떠도는 귀신이거나 우리의 슬픔이 깃든 몸일 수도 있겠지요.

도서관에서 주로 제가 앉는 자리에서는 10년 전쯤 살았던 집이 보입니다. 그때의 제가 베란다에서 바라보던 풍경 속에 지금의 제가 앉아 있습니다. 이 풍경 속에 몸을 놓아둔 채로 저 풍경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자니 우리의 얼굴은 포개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반사성 표면이 되어 서로를 비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들 안의 착오, 진실, 이유, 이해, 사실들은 모두 흩어지고 그것들이 끌어당겼던 감정만이 저의 얼굴에 켜켜이 쌓여 더께를 이루고 있는 것 같군요. 만져보면 얼기설기 얽힌 표면이 되어 있을 것 같아 어쩐지 얼굴을 만져보기가 조금 두렵습니다.

편지를 쓴다는 건 읽는 사람의 얼굴을 상상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군요. 수신인이 특정되지 않은 편지 너머의 얼굴을 상상하는 건 꽤 재밌고 이상한 일입니다. 저는 이 글을 쓰는 동안 자꾸 여러분의 얼굴을 상상하게 되었는데, 물론 이목구비의 형상을 떠올리는 건 아닙니다. 이 편지 너머의 얼굴은 흩어진 채로 자신을 움직이고 지속합니다. 구체적인 피부도 없고 이목구비도 없는 것을 상상하면서도 저는 얼굴을 상상한다고 느낍니다. 제가 상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게 무엇이건 간에 제 상상 너머의, 얼굴을 갖고 계실 여러분 모두 각자가 잠시 머무는 이야기 속에서 좋은 여름 보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