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자연스러운 상태
안녕하세요, 선생님. 먼저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는지부터 말씀드려야겠지요. 저는 어느 날부터인가 도무지 자연을 견딜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 일이거나 그 꿈 이후인 것 같습니다. 아, 제가 말하는 자연은 나무나 풀, 산, 바다 같은 것뿐만은 아닙니다. 알 수 없는 모든 것이지요. 제가 느끼기에 자연이란 도무지 다 알 수 없고, 지금을 순식간에 뒤집으며, 순간 안에서 잡아챌 앎의 실마리를 아주 작은 조각조차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시간의, 얼마나 작은 점 위에서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모든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불가능함을 안다고 해도 도무지 원하기를 멈출 수 없는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모든 자연을 안 보이는 곳에 숨겨 놓거나 안 보이는 곳에 있는 것까지 몽땅 꺼내어 버리고 싶습니다.
“소리는 이미지보다 쉽게 현실을 꿈의 면으로 뒤집는다.
그러니 잠에서 깨듯이 장면을 깨뜨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낡고 구깃구깃한, 일정한 간격으로 줄이 있는 찢어진 종이에 적힌 문장이었는데 나는 이것을 오랫동안 입지 않았던 외투 주머니에서 발견했다. 내 생각이었는지, 누구의 말이었는지, 무슨 영화 대사라거나, 책에서 읽은 문장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큰따옴표 안에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내가 아닌 이의 말이나 생각이었겠거니 추측할 따름이었다. 옷은 헌 옷 수거함에 넣고, 구겨진 종이는 더 구겨서 수거함 옆의 휴지통에 넣었다. 별생각이랄 게 필요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헌 옷 수거함이 있는 길의 모퉁이를 돌 때, 주차장에서 불을 피우는 사람을 보았는데 때 이른 추위 때문인지 열기가 이쪽까지 훅 끼쳐오는 것 같았다. 불기운이라기엔 거의 날씨처럼 느껴지는 열기였다. 무엇보다 이상한 점은 열기를 감각하자 내가 속한 장면 전체가 아주 천천히 녹아갈 것이라는, 분명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건인데도 너무 강렬한 나머지 예감이라기보다는 앎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장면을 깨뜨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저주에 걸린 것처럼 그 순간부터 이 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장면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내리기 위하여 하늘이 깨진다. 무수한 빗방울들, 바닥과 접하며 제각각 깨진다. 빗소리는 중첩되는 파열음으로 장면을 뒤집는다. 담벼락을 뛰어넘으며 고양이가 깨진다. 담벼락 너머 감나무 잎사귀 흔들리며 깨진다. 전봇대 옆에 서 있는 사람의 손에 들린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깨진다.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허공의 어둠을 깨뜨린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손끝에서 넘어가는 책장이 깨진다. 오토바이가 골목 어귀로 사라지며 깨진다. 개와 걷는 저 사람, 개의 독특한 보법 때문에 이상한 방향으로 깨진다. 개의 발에 챈 콜라 캔이 굴러가며 깨진다. 파란색 철문이 열리다 말고 깨진다. 나는 계속 걷고 있고 모든 것이 시야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다. 나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 이 모든 것이 깨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연속적으로 장면의 바깥으로 밀려나며 새로운 장면에 삽입된다. 깨지는 소리가 이전과 이후의 장면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나는 안심한다. 나는 자연스럽게 세계를 견딜 수 있다. 비자연이 되기 위하여 장면의 모든 것은 깨지는 물질을 가진다.
자신의 바닥을 지면과 잘 접하는 위치에 둘 수 있는, 날아가거나 휘청이지 않을 충분한 무게를 가질, 단단한 동시에 잘 깨지는, 깨질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소리만으로도 부서짐을 사실로 만들 수 있는, 자유롭게 형상이 될 수 있는, 완전하게 고정된 형태라고 믿을 수 있는, 자연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다 들여다보인다는 인상을 주는…… 재료를 찾다가 장면들은, 그러니까 내가 머무는 순간들의 모든 이미지는 유리를 물질로 삼기를 택한 것 같았다.
장면의 구성품들이 깨질 때마다 나는 자꾸 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르고, 둘 중 무엇도 꿈이 아니라거나 둘 중 무엇도 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깨지는 비자연에 속해 있으므로 나는 불투명하거나 거칠거칠하거나 북슬북슬한 표면 역시 유리로 빚은 것임을 안다. 과냉각된 상태의 액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이 꿈에는 털투성이의 사랑이 있다. 나의 사랑은 희고 긴 털로 온몸이 뒤덮여 있으며 입을 벌리고, 혓바닥을 내밀고 네 발로 서 있다. 저렇게 털이 많고, 부드럽고, 따뜻해 보이는 생물 역시 깨질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렵대도 소리는 우리가 보는 표면과 관계없이 발생한다. 소리는 이미지보다 쉽게 꿈도 현실로 만든다. 나는 그것의 이름을 부른다. 그것은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렸다는 걸 알게 된다. 장면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자연스럽게 슬픈 예감에 사로잡힌다. 산책을 가자고 해보지만 그것은 유리알에 불과해 보이는, 아무것도 없고 투명함만 있는 멍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할 뿐이다. 나는 그것이 기억을 잃어가는 중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제 이 장면은 유리를 녹일 만큼 뜨겁다. 그것은 녹고 있었다. 목줄을 빠져나가며 녹고 있었다. 걸음마다 장면을 벗어나는 법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법을, 움직이는 법을, 깨지며 다음을 부르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구성하는 물질이 형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온도를 기억과 맞바꾼 것처럼 뜨겁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붙잡는다. 그것은 언제나 나의 움직임보다 빠르게 녹으며 작아지고 있었다. 나의 움직임이 다 알 수 없는 속도로 작아지고 있었다. 자연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더 붙잡는다. 그것은 사라짐을 향해 움직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자연은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향해 움직인다. 더 움직인다.
저는 이 모든 것을 꿈의 면으로 뒤집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이 자연스러웠어요. 그리고 저는 깨닫습니다. 제가 소리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요. 소리는 이미지보다 쉽게 현실을 꿈의 면으로 뒤집습니다. 마침 저희 앞에는 과냉각된 상태의 액체에 담긴 차가운 물이 있군요. 선생님의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파열음)
깨지는 소리가 장면을 파열한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장면으로부터
우리의 목덜미를 잡아챈다
우리는 장면 안의 모양들에 대해 책임져야 했다
깨진 모양에서는 번번이 영혼 비슷한 것이 흘러나와 번거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