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형상

형용사를 하나씩 잃어버리게 되는 병이 돌았습니다. 사람들은 감정을 단어라는 단단한 껍질 안에 안전하게 가둬둘 수 없었습니다. 단어라는 반투명한 용기에 담긴, 반쯤 죽고 반쯤 살아있는 감정을 서로에게 보여줄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 감정들은 무리 짓지 않는 야생 동물처럼 사람들의 얼굴에 너저분한 발자국을 남기며 시간을 배회합니다. 감정은 지나치게 생생한 현실이라서 사람들은 그보다 생생한 현실을 만들기 위해, 감정이라는 현실 너머로도 얼비치는 실제를 갖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시작하는 이야기를, 형용사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분실된 단어를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짓고 들려주기를 좋아했다. 새로운 단어를 상상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기호에 묻은 얼룩들을, 기호라는 몸에 깃든 사건의 망령들을, 서로의 얼굴 깊숙한 곳을 보여주거나 보고 싶었던 것 같다. 형용사의 내부를 구성하고 있는 감정을 표면 없이 마구 풀어주는 것. 배우지 않고 이해하지 않고 그냥 알게 되는 것. 어떤 소리를 기호로 만드는 표면이, 표면만 남은 텅 빈 껍질이 스스로 살을 찾아 욱여넣게 만드는 것. 우린 그런 이야기를 지어내야 했다. 우리를 응시하는 얼굴 같은 것. 우리를 향해 움직이는 형식 같은 것. 사방의 시간을 휘감으며 계속 구르는 돌 같은 것. 몸 없는 것. 몸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 몸보다 멀리 떠도는 것. 몸을 찾아 헤매듯이, 바라는 몸이 이야기 안에 이미 있었던 것처럼, 몸 없이도 이따금 자신의 형상을 보여주는, 그래 귀신처럼 현현하는, 단어 없이도 단어가 품은 모든 것을 한순간 알게 만들어버리는 것. 우리의 입에서 흘러나와 우리의 안팎을 떠돌고, 우리를 자신의 표면에 잠시 맺혔다 사라지는 물방울 같은 것에 불과하게 만드는 이야기.

명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명에겐 쿵이라는 개가 하나 있었습니다. 쿵은 아름다운 걸음을 가진 개였습니다. 쿵은 코로 땅을 두드리듯이, 세계 안쪽에 공손하게 안부를 묻듯이, 발이 닿았던 모든 점과 점 사이의 시간들을 기억하듯이, 기억을 깊숙이 제 안으로 가라앉히듯이 지면을 부드럽게 누르며 걸었습니다. 우리가 어느 날 아름답다는 말을 잃어버린대도, 누구라도 쿵이 걷는 모습을 보면 아름다움을 알게 될, 그 느낌을 포획할 말 같은 건 포기하게 될, 그런 걸음이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명은 쿵이 자꾸 작아지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목줄이 미묘하게 매일 헐거워지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쿵은 밥도 잘 먹고, 잘 걷고, 잘 자고, 작아지는 것 외에는 아주 건강해 보였습니다. 야위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끓는 물처럼 매일 허공으로 소진되듯이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했지만 평생 써왔던 목줄을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만큼 줄였을 때는 착각이라는 믿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쿵을 부르다가, 명은 쿵이 자기 이름을 이루는 소리들을 잊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은 산책이라는 소리를 잊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명은 알았습니다. 쿵은 기억을 잃어가는 중이구나. 쿵은 마치 기억으로 빚은 개인 것처럼, 기억이 살점을 덧붙이는 물질처럼, 기억이 이루는 부피처럼 작아지고 있었구나. 내가 가진 말을 폐기하면서 구성되는, 말이라는 껍질을 덧입지 않은 쿵의 기억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나는 알 수 없었구나. 엎드린 모습이 한겨울 덤불 같던 쿵은 이제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을 만큼 작아졌습니다. 쿵은 산책로를 이탈하듯이 시간에서 삐져나와 있었습니다. 쿵에게는 오직 휘발되는 지금밖에 없었는데, 그건 물질이 될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쿵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걷는 법을 잊었습니다. 냄새 맡는 법도 잊었습니다. 그것을 잊자 쿵이 가진 지금의 면적 역시 아주 조그마해져서, 지금 위로 쌓이는 싸리눈 같은 아주 얇은 기억조차 생성될 수 없었지요. 쿵은 자꾸 작아졌습니다.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작아졌습니다. 새로 산 목줄을 채우는 동안에도 목줄은 자꾸 헐거워졌습니다. 명은 쿵을 붙잡습니다. 쿵은 더 작아집니다. 손에 닿는 쿵의 체온은 겨우 손가락 마디 하나를 건드릴 정도의 것이었습니다. 명은 쿵을 더 붙잡습니다. 쿵은 아주 아주 작아졌습니다. 손금에 미미하게 닿는 쿵의 털은 평생 느껴왔던 것처럼 부드럽고 연약했습니다. 쿵은 형상이 되는 법마저 다 잊어버린 것처럼 작아졌습니다.

그 사람은 개를 더 붙잡으려 했습니다.

이제 없는 개

죽지 않은 개를

다시 붙잡으려 했습니다.

계속 붙잡으려 했습니다.

이야기를 마쳤을 때, 우리의 눈앞에는 흰 물로 가득 찬 창문이 있었다. 그저 벽에 난 구멍이 있고, 구멍에는 유리가 끼워져 있고, 그것이 온통 흰색일 뿐이었는데 우리 모두는 창 너머의 저 흰 것이 거대한 물이라는 걸 알았다. 창문을 여는 순간 실내를 가득 채울 것. 우리를 묻어버릴 것. 우리의 안쪽으로 깊숙이 흘러들어올 것. 그 새하얀 면이 흰 물인 것을 우리는 알았다. 슬픔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려도, 슬픔이라는 단어를 갖지 못해도 슬픔을 알게 되고야 말듯이. 우리는 알았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다. 창문뿐인 이 방에서 나가고 싶었다.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은 현실을 누가 현실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여기에는 카메라도, 캠코더도, 핸드폰도 없다. 저 창문을 가볍게 열고 창틀을 넘으면 그만이다. 흰 것, 우리를 감싸고 짓누르고 파묻고 침투하는 흰 것이라고는…… 내가 입은 검은 옷에 붙은 우리 개의 흰 털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창문은 점점 자라고 있었다. 나는 내가 느끼는 것 외의 다른 현실을 생각할 수 없었다. 감정만이 현실을 구성하고 있었다. 창문을 향해 손을 뻗다 본 손가락은 이미 허옇게 젖은 털 범벅이었다. 명아, 너도 이리 와서 떡 좀 먹어. 우리 중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에 비친 우리의 얼굴은 모두 다르게 얼룩진 같은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