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상태
물질로서의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투명성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물가에서, 유리창 앞에서, 유리컵에 여러 종류의 액체를 따르며, 투명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오랫동안 거듭 이야기를 나누었고 수없이 많은 참고 문헌을 살폈다. 그리고 투명성이란 관계 안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성질이므로, 투명한 물질이란 관계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단 한 겹의 설명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깨끗한 언어로 투명성을 설명하는 대신, 단단하고 투명한 껍질 안에 투명성을 부연하는 말들을 욱여넣고 보관하는 대신 우리는 투명성이 맺고 있는 관계들을 관찰하고 싶었다. 여러 겹의 너덜거리는 견본집 혹은 지문으로 얼룩덜룩한 반투명한 상자 같은 것을 만들고 싶었다. 이를 위한 방법으로 투명성에 대한 기억, 경험, 관계를 묻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중 몇 가지 답변을 여기 옮겨 둔다.
투명성은 물질의 형태로 응고된 체험입니다. 도무지 고정되지 않는 배치입니다. 자연을 배반하는 동시에 자연을 비추고, 서로를 상호 반사함으로써 자연성을 재현하는 물질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연물이 생성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물질이라는 점에서 자연을 배반하지만, 언제나 알 수 없는 자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자연성이라고 본다면 투명한 물질이란 자연성의 기호 같은 것이기도 하지요. 관계 안에서만 존립 가능한 물질이자 관계의 내외부로서, 위치한 자리에서 생성되는 모든 관계들을 비추는 물질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요. 언제나 변화를 선택한다는 것, 변화를 품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변화를 통과해 나가는 방식으로 시간을 겪지 않는다는 점 역시 중요합니다. 아, 사실 제가 투명이라는 말을 자꾸 유리라는 물질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을 이쯤에서 밝혀야 할 것 같군요. 저도 방금 깨달은 사실입니다.
투명함이 비가시성을 버리는 순간은 언제나 자신 바깥의 세계와 중첩을 이루는 표면이 될 때인 것처럼, 유리 역시 무질서한 구조의 고체와 과냉각된 상태의 액체라는 중첩을 품고 있습니다. 유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물질입니다. 미지와 불확정의 영역에 머무는 채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투명성입니다. 간섭당하는 표면이나 가변적인 내부를 통해서만, 비결정적인 중첩을 통해서만 물질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유가 아닙니다. 유리가 물처럼 자신이 담기는 장소에 따라 형태를 바꾸지 않는 이유를, 비결정질 상태에 머무는 동시에 거의 움직이지 않는 입자를 가질 수 있는 이유를 인간들은 아직 밝히지 못했어요. 액체로 보이지만 고체로 존재하는 유리의 원자 구조는 물질 상태의 기본 법칙에서 예외입니다. 유리 전이 과정은 물리학의 미해결 난제 중 하나라고들 하지요.
‘투명하다’를 ‘보이지 않는다’와 같은 형용사구로 두지 않기 위해서는 투명한 표면을 영원한 가변성의 상태에 놓아두어야 합니다. 빛과 다른 물질을 향해 개방해야 하지요. 투명한 표면은 시각적 대상이 되기 위해 다른 물질과의 관계를, 시간이라는 조건을 요구합니다. 투명함이란 어떤 식으로든 보이지 않게 되는 물리적 조건이지만, 놓인 장소와 관계 맺음으로써 스스로의 일부를 감추고 일부를 드러내는, 주변부와의 관계를 가시화하는 매개이기도 합니다. 투명성은, 유리는, 특히 유리의 투명성은 변화 안에서만 존재하며 변화와 함께 영속합니다. 투명성이 겪는 변화는 대상 자체를 위협하지 않아요. 오히려 보호하지요.
언젠가 심해 생물을 다루는 책에서 유리 문어에 관한 문헌을 읽었습니다. 유리 문어가 ‘유리’ 문어인 이유는 온몸이 투명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잘 깨지거나, 단단하거나, 700도 이상의 온도에서는 액체가 되거나, 액체도 고체도 아닌 물질이기 때문이 아니라요. 유리 문어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투명성을 택했습니다. 아시겠지만, 빛이 없는 곳에서 투명함은 보이지 않음과 거의 완벽하게 등가교환 가능한 속성이 됩니다. 천천히 움직이는 유리 문어의 표면에는 아무것도 반사되지 않습니다. 유리 문어의 직사각형 안구나 시신경, 소화관처럼 투명성에서 벗어난 내부 역시 오직 어둠만이 지나갈 수 있는 공간에 놓인 투명한 피부의 안쪽에서는 어렴풋하게 꿈틀대는 어둠이 될 뿐입니다. 그들이 가진 투명성이란 투명함의 안쪽을 들여다보거나, 투명한 표면에 어른거리는 풍경을 감상하거나, 이 모든 것에 매혹되며 제 앞을 배회하는 우리를 비추는 지상의 투명함과는 다르지요. 유리 문어의 투명성은 비가시성으로 존재하며 그들은 이 조건을 통해 생존합니다.
지금 저는 햇빛이 잘 드는 하얗고 텅 빈 공간에 놓인 거대한 유리 조각 앞에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투명한 동시에 아주 잘 보입니다. 투명한 유리의 위태로움은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이토록 거대하고 묵직하며 속을 다 내보이는 동시에 불가해함을 안고 있는 것. 우리의 얼굴과 우리의 등 뒤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 이 단단한 고체가 사실은 잠시 과냉각된 상태의 액체에 불과하기도 하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이것은 잠시 스스로의 형상을 선택한 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잠시, 잠시라는 말이 이상하군요. 그러나 유리에게 부여한 이 ‘잠시’라는 시간성을 번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유리를 얼어붙게 할 정도의 온도는 이 세계에서 저의 몸보다 오래 유지될 조건임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잠시’ 머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표면이 덧입는 이미지가 끝없이 유동하는 변화의 반영이라는 것만으로도 저는 이것을 아주 짧은 영원처럼 감각하게 되는군요. 유리의 투명성이 겪는 시간이란 오직 현재뿐인 것 같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라는 시간 자체가 일종의 환상이라 할지라도 투명한 표면은 빛 앞에서 이것을 잠시 실재하는 것으로 붙잡고 어른거리는 형상으로, 시각적 대상으로 만듭니다.
이것은 거대한 물웅덩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질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따라 정체성이 결정되는, 영원한 관계의 한 형태. 대략 4천 킬로그램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거의 비물질처럼 느껴지는 것. 미확정의 시간 안에서 출렁이는 표면을 가진 것.
손으로 힘껏 밀어 보지만 미동이 없습니다. 주먹으로 내려쳐 보지만 깨지지 않습니다. 표면 안으로 손이 빠지지도 않습니다. 내외부가 완전히 달라붙어 있는 상태의 이 몸이, 이 표면이라는 환상이 우리를 위험한 환상으로부터 지켜주는 것 같습니다. 이 물체의 역사에 액체로 존재했던 시간이 있다는 것, 지금도 과냉각된 상태의 액체에 불과하다는 것, 말랑말랑한 반고체의 몸을 지녔던 적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투명한 표면이란 불투명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떤 순간에도 훼손되지 않는 투명함은 불가능합니다. 투명한 물질은 그것의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는 질문으로부터, 그것의 주변에 무엇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중첩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죠. 비어 있지 않은, 그러나 다른 물질에게 공간을 내어준 적도 없는 투명한 껍질을 보는 일은 매우 드물 겁니다. 투명한 물질에는 빈터가 없습니다. 언제나 무언가로 채워질 것이라는 가능성으로서의 물질. 한없이 개방된 내부란 결국 빈터 없이 우글거리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아무 내용도 없는 내부, 정말로 아무런 내부도 없기 때문에 무언가를 위한 자리로서만 존재하는 것. 단지 윤곽으로만 존재하는 개체.
그러나 제 앞의 이 거대한 유리 조각에는 외부와 구분되는 내부라는 것이 없습니다.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이것의 내부는 외부를 이루는 물질의 연속일 뿐입니다. 이 안에는 뭐가 들어있어요? 제 옆에서 까치발을 들고 조각의 안쪽을 들여다보기 위해 애쓰던 어린이가 묻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투명성을 결정하는 것은 표면의 일이지만, 투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내부의 일이니까요. 물론 투명한 컵은 내부의 물질에 의해 투명성이 손상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투명한 컵이라고 불릴 겁니다. 그러나 피부 없이 몸 자체로 과냉각된 덩어리라면, 공간을 내포하지 않은 껍질이라면, 스스로 형상을 구축하는 액체라면…… 유리의 안쪽에는 네가 보는 바로 그 표면이 있다는 것을, 투명성이 껍질에 부여되는 속성이라는 환상을 깨는, 투명함에 대한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런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제 눈앞의 물질은 시간의 미세한 진동이나 사소한 동작까지 놓치지 않는 표면이 되어주고 있군요. 단지 무언가의 반영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표면. 내부 없는 피부.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내부를 대신해 시간의 모든 떨림에 반응하며, 유동하며 촘촘한 변화를 수행하는 표면.
이것은 우리를 붙잡아둡니다. 우리를 멈추게 합니다. 시간에 작고 가느다란 축을 세우고, 그곳에 맺혀 있는 물방울 같은 존재로 우리를 재구성합니다. 우리의 시간에 작은 금을 내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만들고, 우리가 넘어진 공간을 점차 넓게 벌려둡니다. 사랑이 시간을 다루는 방식과 비슷하게요. 투명성은 언제나 우리를 무와 무한 사이에 혼란스럽게 풀어놓지요. 우리는 투명성 덕분에 아무것도 없음과 무한한 있음 사이의 틈새에서, 우리가 겪는 짧은 영원 동안 배회하며 발자국을 남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투명하고 거대한 물질은 자신이 겪는, 자신에게 벌어지는, 매 순간 새로운 실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눈앞의 물질을 이루는 입자들은 어색하게 이 세계의 온도를 감당하며 잠시 정지한, 매끈하고 투명한 표면이 되어 있군요. 잠시 스스로 형상이기를 택한 물처럼, 물이 머무는 밀폐된 영원처럼 유동성을 내포한 채 고정되어 있군요. 현재라는 감각보다 생생한 표면에 어른거리는 얼굴을 봅니다. 빛과 대기의 간섭을 받으며, 일렁이며, 출렁이며, 흔들리며, 시간에 반응하며 있는 얼굴. 투명성을 훼손하고 있는, 투명한 물질을 시각적 대상으로 내보이는 이 얼굴을 봅니다.
전시장은 점점 북적이고 있습니다. 유리 조각의 표면 역시 점점 더 많은 얼굴로 북적입니다. 제 뒤의 얼굴을 가진 이에게 이 유리 조각은 저의 얼굴이 포개진 반투명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여전히 투명한 물질로 분류됩니다. 우리의 몸은 투명성을 흐릿하게 만들며 어른거립니다. 우리는 서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들은 서로를 포개며, 뒤섞으며, 투명성과 구분되지 않으며, 투명한 물질의 구조가 되며, 끝없이 움직이는 물질이 잠시 머무는 배치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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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답변 ‘가변 영원’은 로니 혼(Roni Horn)의 유리 조각 연작을 재료로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