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숨
처음 운전대를 잡은 날, 굽이길에서 처음으로 곡선을 그리며 나아갈 때, 그때 앞서 가던 트럭에서 쌀 포대가 떨어졌어. 흰 쌀알들이 사방으로 쏟아지고 그날 그때 그곳에는 싸리눈이 흩날리고 있었고 비슷한 크기의 흰 입자들, 비정형으로 둥근 그 새하얀 입자들이 길 위로 분분히 흩날렸어. 도로 위로 도로변의 깃털 위로 마른 풀 위로 뒤엉키며 쌓였어. 얼굴이 엎질러진 것 같았어. 물론 여기저기가 굽어진 길이었어. 물론 모퉁이란 언제나 갑작스럽게 마주치는 얼굴들을 품고 있었어. 어떤 얼굴은 예언 같고 어떤 얼굴은 손님 같고 어떤 얼굴은 꿈에서 본 것 같고 어떤 얼굴은 지방 소도시에서 만난 용한 점쟁이, 어떤 얼굴은 보일러실에 살던 새끼 고양이들, 또 어떤 얼굴은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여자애, 또 어떤 얼굴은 그 여자애가 교복 안주머니에 숨겨온 햄스터를 닮았지. 어떤 날 어떤 골목을 걸을 때 내가 쥐고 있는 건 모자 하나가 전부였어. 아주 중요한 것을 사러가는 길이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는지는 기억나질 않았지. 내가 모퉁이를 돌 때, 털모자를 쓴 이가 전화기에 대고 모자를 뒤집으면 집이 시작될 거라 말하며 지나갔어. 내게 있는 건 아주 가볍고 얇은 모자였고 나는 그걸 손에 말아쥐고 있었지. 이상스러울 만큼 성글게 짜인, 손을 놓으면 둥둥 떠오를 것 같은, 날개에서 떨어져나온 깃털로 짠 것 같은 아주 부드럽고 아주 가벼운 모자였어. 잠든 사람의 숨을 말아쥔 것 같은 모자였어. 그 모자 때문에 나의 손이 가진 물성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단단하고 빈틈 없이 꽉 차 있는 구조로 느껴졌어. 추운 날이었는데 손에선 자꾸 땀이났어. 손에 쥔 숨, 숨 같은 모자, 모자를 이루는 숨도 축축해지는 것 같았어. 별안간 강렬하게 배가 고팠고 그러자 내가 사러가는 그것이 갓 빚은 경단이나 동그란 주먹밥이었던 것 같았지. 아니 그걸 사서 모자에 담아 돌아오는 길인 것 같았지. 따뜻하고 축축하고 아주 가벼운 모자. 아주 부드러운 모자. 평범하게 값을 치르고 평범하게 따뜻한 기운과 냄새를 풍기는 것을 모자에 담았는데 그 모자가 이런 모자라는 이유 만으로 모든 것이 절박하게 느껴졌지. 앞날이 필요하다고 느꼈지. 앞날을 품는 집 같은 것. 밥을 씹어 삼키는 쌀알 같은 이빨들. 운명 손금 미래 봐드립니다 적힌 천막을 젖히고 들어가 예언을 청했지. 복채로 모자에서 꺼낸 경단인지 주먹밥인지를 나눠 주었지. 모자의 성근 구조 너머로 익힌 쌀가루와 밥과 참기름 냄새를 풍기면서. 물론 고소한 냄새였지. 물론 슬퍼지는 냄새였지. 그는 모자를 만지작대며 이것도 내가 보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했어. 모자를 뒤집으며 집이 있다고 말하는 그는 아주아주 연약해 보였어. 모자는 뒤집힌 채로도 여전히 움푹하고 여전히 머리에 잘 맞아 보였어. 주위를 아늑하게 감싸며 얼굴의 친절한 주변이 될 것 같았어. 모퉁이를 돌면 갑자기 만나게 되는 얼굴 같고 그의 주머니에 담긴 얼굴, 그 주머니 근처로 몰려들던 어떤 얼굴, 또 어떤 얼굴의 언니, 그 언니가 키우던 강아지, 또 나를 놀라게 하던 모든 얼굴, 아니 모든 얼굴이 나를 놀라게 하던 방식 같은······ 모자를 뒤집으면 시작되는 집 같은······ 그이가 모자를 쓰자 흰 밥알이 후두둑 쏟아져 우린 고소한 빛 속에 영영 파묻히게 되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