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들―무른 산 김리윤
부서지고 부러진 김선오
비유와 착각 김리윤
구름 지우기 김선오
소리, 몸 김리윤
〈태몽들〉 작업 노트 김선오
숨과 올 김리윤
스타일 김선오
잠과 뼈 김리윤
김선오
전망들―감정과 사물 김리윤
내가 흐른다고 믿은 것 김선오
전망들―장면의 자락 김리윤
불결한 무(無) 김선오






배회와 궤적
  1. 흰 새의 뒤통수를 구성하는 흰 것과 희지 않은 것
  2. 더미와 형상


베를린에서 쓰기
  1. 2024.12.31 · 2025.1.1
  2. 2025.3.18


부드러운 재료
  1. 유리 상태: 가변 영원
  2. 유리 상태: 이미지 되기
  3. 유리 상태: 사랑과 작은 사자


시와 물질
  1. 비는 해수면에 닿는 순간 바다라 불린다
  2. 잠시 가두며, 표면을 흐르게 하며, 투명한 몸으로 통과 시키며
  3. 우리가 벌을 볼 때마다
  4. 미완 귀신 Unfinished Ghosts: 퀴어 포트레이트, 치앙마이
  5. 미완 귀신 Unfinished Ghosts: Intro
  6. 미완 귀신 Unfinished Ghosts: Prototype Ghost, Chiang Mai
  7. 〈비는 해수면에 닿는 순간 바다라 불린다〉 작업 노트


편지
  1. 익명의 독자님께
  2. 치앙마이에서 보내는 편지
  3. 도이사켓에서 보내는 편지


시대모사
  1. 어떤 착지 / 파동
  2. 산책법
  3. 물잔을 이해하다
  4. 씻긴 신


새 손
  1. 작업 노트
  2. 「깨끗하게 씻은 추상」을 위한 메모 또는 씻은 손 일지
  3. 깨끗하게 씻은 추상
  4. 전시 연계 텍스트: 눈과 손
  5. 인터뷰


전망들
  1. 전망들―무른 산
  2. 전망들―감정과 사물
  3. 전망들―장면의 자락
  4. 전망들―우연과 리듬
  5. 전망들―한 마리 하나 한 개
  6. 전망들―새 얼굴로
  7. 「전망들―새 얼굴로」를 위한 시작 노트
  8. 새 손으로
  9. 전망들


비유와 착각





모자를 뒤집으면 시작되는 집이 있다.


네가 설명하고 싶었던 건 그냥 한 장면이었다. 누구나 모자를 쓰고 다니는 도시의 겨울을 걸으면서. 이 장소는 평평하다고 착각된다. 네가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던 건 우리에게 현실의 지나친 세부 대신 말이라는 추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양지 바른 곳에 널린 모자’ 라거나 ‘바람에 날아가는 모자’, ‘모자 안의 새소리’, ‘떨어지는 모자와 날아오르는 새’, ‘저 사람이 베고 잠든 모자’, ‘한숨 쉴 때마다 나부끼는 모자 챙’, ‘꼭 맞게 만드려고 머리통에 대고 모자를 짜는 중인 사람’, ‘털모자를 쓴, 모자보다 털이 긴 개’ 같은 것. 하나의 기억과 거기 하나로 뭉쳐져 있는 시간, 이 뭉쳐짐을 위해 필요했던 망각, 세부를 뭉그러뜨리는 눈. 우리를 촉발한 우연과 우연을 가능하게 한 안개에 대해서. 스러짐은 연속을 향해 열려 있는 동사라는 것, 스러짐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장소라는 것…… 또 우리를 촉발한 우연의 리듬에 대해서. 다른 나라, 다른 도시, 다른 말, 다른 냄새가 휘젓는 시간에 대해서.


이제 집에 갈까? 기억이 통하지 않는 장소에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말은 우리를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시간 만큼이나 사실도 벗어날 수 없는 거잖아.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움직이게 했다. 우리를 떠나게 했다. 이거 새 소리야? 무슨 새야? 이국의 건물들 언어들 간판들 눈동자들보다 가로수와 덤불 속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가 이곳의 신비를 구성하고 있었다. 우리는 낯선 땅에서 지도앱을 켠 채로 집에 가는 길을 만들면서, 길을 걷고 길을 잊으면서,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깜빡이는 점으로서, 여기저기서 마구잡이로 지저귀듯 웃었다. 너의 벌어진 입꼬리에 맺힌, 이따금 땅으로 떨어지는 침이 우리의 메아리로서 우리의 웃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골목에서 집들이 깊어지고 있었다. 무언가 구워지고 튀겨지고 푹 고아지는 따뜻한 냄새가 풍겨오고, 우린 입안 가득 고이는 침 때문에 곤란해 하면서 웃고 있었다. 웃음이 반복되고 있었다. 집이 깊어질수록 더 많은 우리가 어둠 속에 잠겼다. 우리의 우리됨을 알 수 없게 하는, 우리의 다른 가능성을 볼 수 없게 하는, 우리의 그림자를 잊게 만드는 부드러운 어둠에. 어쨌거나 우리는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흰 모자 하나가 떨어져 있는 어둠에 잠긴 골목에서. 낮을 숨겨둔 것처럼 은밀하게 빛나고 있는 모자가 있는 골목에서. 만두피 안의 두부처럼 어렴풋하게 모자 바깥으로 새어나오는 빛이 있는 골목에서. 그 빛에 이끌려 무심코 모자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 놓았을 때 우린 몹시 피로하고 배가 고팠다. 그리고 아침에 남은 미역국을 데우고 길쭉한 쌀로 지은 흰 밥을 퍼 식탁 앞에 않았을 때. 그러고보니 아까 그 모자, 그 모자에서 같은 냄새가 났어. 이 냄새. 막 취사가 끝난 밥솥을 열었을 때 나는 이 냄새. 이게 있었어, 그 모자에. 밥에서 피어오른 김과 섞이고 있는 네가 말한 거였다.


비 새는 지붕이 있더라도 집은 집이니까. 축축해도. 아주 덥거나 아주 추워도. 집을 집이게 하는 것이 있다면…… 집에 가자는 말 같은 것, 그런 것. 그냥 한 장면을 설명하려고 했을 뿐인데, 이 모든 것이 무슨 장면을 시작하려고 시작된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한 점의 현실을 불러오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앎이 있고. 시간과 앎을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빚기 위해 필요한 분실이 있고. 그 모자. 그 사람이 정말 두고 간 그것. 그 모자에 대한 기억. 그 기억의 거짓말. 모자 안에서 집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이야기. 뭐였을까? 이 장면을 보는 이 없이도, 믿거나 믿지 못하는 이 없이도 이미 시작된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는 아주아주 깊고 아주아주 넓고…… 밥솥의 김이 얼굴에 한겹의 수중기를 덧입히는 동안에도, 소매끝에 붙은 밥풀이 노랗게 말라가는 동안에도, 오래 살고 싶다는 마음의 징그러움을 흰 쌀밥과 함께 밀어 넣는 동안에도 시간이 우리의 정수리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도서관 옆자리에서 아주 곤히 아주 깊이

잠든 네가 벤 흰 모자가 침으로 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