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재료

우린 몸 없이도 피로와 수치를

바깥의 추위를 알았지. 무서워했지.

가진 형태 없이

우린 꽤나 애를 썼지. 매일같이 무용한 몸짓들을 반복했지. 시커멓게 커피가 눌어붙은 컵은 개수대로, 화병 안의 썩은 물은 하수구로.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고 싶은 마음 때문에 주저앉아 바닥을 치며 울었지. 손 없이도 바닥을 친다는 마음으로 울었지. 죽도록 피로했지. 치워도 치워도 더러운 식탁에 원한을 품었지. 원한을 품은 마음이 수치스러워 한 번만 더 죽고 싶었지.

손을 빌려볼까

머물 장소를 빌려볼까

좁고 희박하고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도 괜찮지

빌린 집에 갇혔다고 느끼는 손님은 없는 법이지

우린 어디에서나 손님일 수 있는 재료다

기척 없이 움직이며 장소를 헝클어뜨리는 사람들

굳지 않는

무르고 부드러운

언제나 무너지고 있는 재료

우리에겐 완성될 형태가 없다

자유롭다

손님의 마음으로 소파에 앉으니

몸은 무참한 장소가 아니다

언제든 문을 닫고, 열쇠는 화분 밑에 넣어두고

떠날 수 있다면

연약함은 문제도 아니다

부드럽고 물컹물컹한 재료는 다루기 어렵다고

우리 모두 역겨운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그래도 우릴 빚을 때 참 어렵고 재밌었을 거라고

말해 봐

부드러운 재료를 써서 만든 것들은 아주 조금씩 

끊임없이 계속 변형되고

재료에 내재한 미미한 운동성, 그것이 관객의 주의를 끌지요

한순간의 누락도 없이 고정되는 시선을 요구하지요

빌린 몸의 몸짓은 몸의 것인가 마음의 것인가

의미를 돌봐야 할까 몸을 돌봐야 할까

시선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무엇을 바라볼까

젖은 담요를 덮고 팔짱을 끼고, 활활 타는 집을 멀거니 바라보며, 아무도 다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집이야 다시 지으면 그만이지 않겠냐고 말하는 당신의 선명한 얼굴. 당신 얼굴의 실팍한 물성. 시선을 다 써버린, 세계를 반사하는 눈동자.

세계를 몽땅 먹어 치운 것처럼

눈동자 표면에서 일렁이는 불빛.

사랑에 빠진 것처럼

빌린 몸을 마음으로 돌보는

부드러운 재료로 빚은 손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