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회와 궤적
인중 가운데로 떨어지는 눈은 차갑다. 고개를 들자 눈송이 하나하나가 허공을 어지럽히며 아주 천천히, 천천히 떨어지고 있어 이상했다. 그것들은 내가 보고 있는 세계의 막과 내가 딛는 지면 사이의 공간에 존재하며 중력과 관계를 맺고, 관계와 시간 사이에서 비가역적인 움직임을 갖는 개별적인 생물 같았다. 아무것도 속하지 않은 시간, 아무것도 없고 무엇도 흐름을 감각하지 않는 텅 빈 시간, 무엇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 시간도 지속된다. 지속은 영원함이 아니라 도리 없이 속하게 되는 비가역성을 뜻한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음은 영속성이 아니라 방향 없이 자꾸 돌아오는 시간의 지속을. 돌이킬 수 없음. 집중해서 보자면 눈송이 하나하나의 생김새를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느리게 떨어지는 눈, 피부와 접하는 눈송이의 모서리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이 늘어남이 이뤄지는 시간, 아주 조그마한 그 시간을 다 느낄 수 있을 것처럼 인중 위로 떨어지는 눈. 눈은 순식간에 입술을 미미하게 적시는 정도의 습기로 사라진다.
오늘 우리의 몸은 지면을 누르는 두 개의 힘 같다. 오늘 우리의 몸은 지면이 감당하는 여럿 중 두 개의 무게 같다. 오늘은 우리의 몸과 중력이 맺는 관계가 잘 보인다. 네 개의 눈, 네 개의 귀, 여섯 개의 발, 코와 입 둘씩. 한 쌍의 눈과 귀와 발, 코와 입.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갔더니 호수 초입의 너른 풀밭에는 커다랗고 매끈한 눈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함께 깨끗한 눈을 밟았다. 우리의 걸음은 쌓인 눈의 깨끗함을 훼손하는 움직임이었다. 개가 망설임 없이 새하얀 지면 위를 달린다. 빠르게 걷는다. 자기 냄새를 흩뿌린다. 개에게 눈은 방금 묻힌 자신의 냄새가 가진 일시적인 몸일까? 개의 발과 엇비슷한 크기로 동그랗게 움푹 파인 자리가 점점 더 어지럽게 흩어진다. 개의 배에 살짝 닿을 정도로 쌓인 눈은 몸과 접촉할 때마다 헝클어지고, 헝클어진 부분은 거의 투명하게 느껴질 만큼 얇고 흰 털에 달라붙어 빛을 받는다. 개와 함께 움직인다. 흩어지거나 녹으며 적신다.
우리의 몸이 가진 질량이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걸음마다 우리에게 내재한 물질과 무게와 중력을 생생하게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눈. 두텁게 쌓인 눈. 눈이 한 겹의 두텁고 부드럽고 차가운 지면을 이루는 오늘 같은 날, 지면은 미세한 움직임만으로도 흩날리고 손상되고 헝클어지는 것이 된다. 지면의 매끈함은 연약하다. 개는 17킬로그램의 무게로 움푹 파인 궤적을 남기며 걷는다. 달린다. 이따금 눈 속으로 코를 파묻으며 냄새를 맡는다. 검고 촉촉한 개의 코 위에 묻은 눈 입자들은 세계의 픽셀 하나를 떼어내 관찰하는 것처럼 무척 조그마하고 선명하다. 오늘, 코로 땅을 두드리듯이 걸을 수는 없다. 우리가 가진 지면은 우리의 질량에 비해 너무 연약하고 성근 것이 되기 때문이다. 두드린 자리에는 문보다 먼저 구멍이 뚫리기 때문이다. 거대한 전나무 아래서 볼일을 본 개가 가벼운 동작으로 뒷발을 구르며 냄새를 퍼뜨린다. 개의 발아래서 부서진 지면이 허공으로 흩뿌려지는 것, 그 흩어짐이 지면 아래의 풀뿌리며 시든 잎사귀 조각과 얽혀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눈과 눈 위에 묻은 것들, 눈 사이와 눈 아래 파묻힌 것들이 뭉친 눈을 던지듯이 개의 감각을 향하는 것을, 눈덩이가 어딘가 부딪혀 산산조각 나듯이 하나하나의 냄새 조각이 되어 개의 콧속으로 스미는 것을 상상한다.
개와 물가에 서서 살얼음이 낀 호수에 백조가 긴 목을 집어넣은 채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았다. 물의 떨림이, 물 위를 떠다니는 살얼음 조각들이 백조를 부드럽게 흔드는 움직임이 되는 것을. 아니 백조의 부드러운 움직임이 물을 미세하게 흔드는 중심이 되는 것을. 바람이 돌아다니는 것을. 나무가 흔들리고, 나무 위에 쌓여 있던 눈이 허공을 헝클며 수면 위로 떨어진다. 가볍게 가볍게 비정형의 곡선을 그린다. 머리통을 숨긴 백조는 거의 눈 만큼 희다. 백조의 뒤통수는 눈의 흰빛을 흰색이라고 하고 보자면 충분히 희지 않다. 그리고 사실 눈의 흼에 비하면 대부분의 물질은 충분히 희지 않다. 우리 개의 흰 털도, 그럼에도 그것을 ‘흰’ 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얼룩덜룩한 언어도. 깨끗한 무의 상태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다는 불가능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비우거나 버린 이후라고, 그러한 감행의 결과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는 지면을 온통 덮어 새로운 지면을 이루는 눈이야말로 가장 무의,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흰색이라고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지. 우리가 눈 아래의 세계를 너무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은 텅텅 비워진 무의 색으로 느껴진다. 개의 흰 털과 백조의 흰 머리통 안쪽을 나는 모른다.
떨어지는 눈이 백조와 허공을 부드럽게 혼동한다. 세계의 간섭 안에서 조금씩 흩어지는 움직임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가 속한 간격 안에서 눈이라는 임시적인 지면이 헝클어짐을 만들듯이. 개가 몸을 턴다. 나는 간지럽다는 감각을 따라 얼굴을 더듬어 개의 털을 떼어낸다. 손가락 위에서 작게 흔들리는 가느다란 빛이 허공의 일부를 가로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