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해결하고
“움직임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그때까지 스스로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제가 이 주제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나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해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박솔뫼 『극동의 여자 친구들』 중에서
몸을 가진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움직인다. 물론 몸이라는 것을 넓게 보자면 몸은 바람에도, 물에도, 숨에도 있다. 책 표지에서 움직임이라는 단어를 봤을 때, ‘움직임 연구회’ 간판에 붙들린 강주처럼 나의 움직임을 문득 의식하게 되었다. 평소 나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는 잘 감각되지 않고 흔적을 본 다음 더듬어 추측하는 방식으로만 설명되기 때문이다. 한쪽 방향만 기우뚱하게 닳은 신발 밑창, 몸의 특정 부위에 즐비한 멍, 황당한 방식으로 넘어졌던 장면을 무수히 기억하는 친구들, 종일 같이 다녀도 걸음 수가 동행의 1.5배는 되는 아이폰 건강앱 기록 같은 것. 나의 움직임은 언제나 내 결정 바깥에서 찰랑이며 자주 부딪히고, 넘어지고, 좁은 보폭으로 느리게 걷는 몸을 작동시키는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움직이는 나의 몸을 둘 자리, 나의 바깥과 관계 맺는 방식 정도가 우리의 결정과 연루되어 있는 것 같다.
한 개체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언제나 변화를 담보하고 시간을 끌어당기며, 나의 바깥과 뒤섞이는 사건을 발생시킨다. 내 움직임의 방식 대신 우리의 몸을, 우리의 움직임을 의식하는 동안 너와 나로 구분되는 몸, 몸 사이의 간격을 잊게 된다. 뒤섞인 숨들로 자욱한 허공에서 너의 숨과 나의 숨을 구분할 수 없듯이. 가위에 눌렸을 때 손가락 끝부터 움직여야 빠져나올 수 있다는 미신처럼, 현실로 착각되는 비현실(또는 다른 현실) 안에서 작은 움직임은 착각을 깨뜨리는 것이 된다. 그러나 생활이 속해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움직임은 나와 나의 바깥이 서로를 착각하게 만드는 부드러운 운동이 된다.
지난 해 여름 머물렀던 태국 북부의 레지던시에서는 ‘젠더 댄스’라는 대단한 이름의 워크숍에 참여해야 했는데, 이름과는 달리 평범하고 지루한 자아 찾기 과정 같은 게(당신은 어떤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이 편한가? 당신은 누구/무엇에게 끌리는가? 어떤 신체 부위가 당신의 욕망을 작동시키는가?) 이어지는 가운데 함께 레지던시에 머물던 작가들과 둘씩 짝을 지어 서로의 움직임을 따라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의 파트너는 영국에서 온 조나단이었고 그는 나보다 서른 살쯤 나이가 많았으며 30센치미터쯤 더 컸다. 우리는 설명에 따라 오로지 서로의 눈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어른거리는 상대의 움직임을 따랐다. 조나단이 리드할 때도, 내가 리드할 때도 어쩐지 내가 한 번도 움직여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움직이게 되었고 그 것이 이상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또한 이상했다. 움직임 자체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던 파란 눈동자를 무언가로 착각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나였는지, 모르는 사람이나 시간 같은 것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개와 매일 많은 시간을 걸으며 여름을 보내고 있다. 걷는 동안 종종 바람과 등을 맞대고 있고, 그 바람은 다시 나뭇잎과 등을 맞대고, 또 새와 맞대고, 새는 구름과 맞대고… 그렇게 함께 움직이며 서로의 어깨뼈를 혼동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개는 걷는 동안 자주 곤경에 처한다. 나무 둥치에 리드줄이 걸려서, 볼일이 급해서, 땅이 젖어서, 저쪽에서 다가오는 개가 무서워서, 열차 소리가 가까이 들리는데 어디로 가야 탈 수 있는지 몰라서. 곤경에 처한 개 앞에서 나는 대체로 발이 가벼워지고,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 있고, 명료하고 단순하게 몸을 다루는 사람처럼, 그렇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좋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같은 질문에서 잠시 벗어나, 나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해결한 듯이.